한국 선수 겨누는 ‘인종차별’ 돌림노래 [경기장의 안과 밖]
잉글랜드 울버햄프턴의 간판 공격수이자 한국 대표 선수로 활약하는 황희찬이 새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고생을 하게 됐다. 축구를 했을 뿐인데 별안간 인종차별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이다.
황희찬은 7월15일 스페인 마르베야에서 진행된 소속팀 울버햄프턴의 프리시즌 친선 경기에 교체 출전했다. 상대는 최근 이탈리아 1부 리그 세리에 A로 승격한 코모1907. 경기 중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울버햄프턴 측면 공격수 다니엘 포덴세가 코모의 수비수를 가격해 퇴장당했다. 포덴세의 돌발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상대 수비수가 황희찬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했고, 이에 격분한 포덴세가 대신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 게리 오닐 울버햄프턴 감독은 황희찬에게 경기를 계속 뛸 수 있겠느냐며 심리 상태를 확인했다. 황희찬은 계속 뛰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오닐 감독은 “황희찬은 모욕적인 일을 겪고도 팀을 생각했다. 그는 우리 팀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황희찬은 이틀 뒤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심정을 토로했다. “인종차별은 스포츠뿐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대표팀 주장이자 선배인 손흥민이 힘을 실었다. 해당 게시물에 영문 댓글로 “난 너의 곁에 있어”라는 지지와 함께 ‘인종차별이 설 자리는 없다(No room for racism)’라는 해시태그를 남겼다.
코모 구단은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 역설적으로, 코모 구단이 공식 홈페이지에 올린 반박 성명에서 황희찬에게 가한 차별적 발언이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코모 구단은 “해당 수비수가 동료에게 ‘그냥 무시해. 자신이 재키 챈(성룡)인 줄 알아’라고 말했다”라고 해명했다. 황희찬이 ‘차니(Channy)’라는 애칭으로 불린 데서 불거진 해프닝으로 치부한 것이다. 또 “일부 울버햄프턴 선수들이 이 사건을 너무 과장되게 만들어 실망스럽다”라며 전형적인 ‘가해자 화법’을 썼다. 코모 측의 해명으로 오히려 자가당착에 가까운 차별을 재확인한 셈이다.
이 상황에서 ‘재키 챈’이라는 이름이 존중의 의미로 소환되었다고 해석할 여지는 없다. 재키 챈은 홍콩 액션 스타 이름이지만, 서구에서 그 명칭은 동양인을 비하하는 의미로 종종 쓰인다. 동양인은 ‘눈이 작은 인종’이라거나 동양인이라면 무술에 능할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정형화하는 이름이다. 울버햄프턴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유럽축구연맹(UEFA)에 공식 항의서를 제출할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 모두가 비니시우스다”
국제축구연맹(FIFA)을 비롯한 축구 단체들은 21세기 들어 인종차별 문제에 단호하게 대응해왔다. 월드컵 등 큰 대회에서는 어김없이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을 진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축구계 중심부에서는 매 시즌 인종차별 논란이 수없이 불거진다. 대체로 서구 백인들이 주도하는 무대에 다양한 인종과 민족에게 기회를 주는 시혜적 태도 혹은 서커스에서 묘기를 부리는 동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 깔려 있다. ‘축구 왕국’ 브라질 출신의 선수라도, 흑인이라면 차별의 대상이 되기 쉽다. 최근 가장 큰 논란의 중심에 선 선수는 비니시우스 주니오르(레알 마드리드)였다.
비니시우스는 2023년 5월 발렌시아와의 리그 경기에서 상대 팬들로부터 “모노(원숭이)”라는 조롱을 들었다. 그는 관중과 언쟁을 펼치며 항의했고, 경기는 10분가량 중단됐다. 그를 향한 인신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경기 재개 후 관중들은 원숭이 울음소리를 내는가 하면 라이터 등 이물질을 그라운드로 던지기도 했다. 인내심에 한계가 온 비니시우스는 경기 막판 자신을 모욕한 관중에게 삿대질을 하며 맞섰다. 충돌을 말리는 상대 팀 선수들과 몸싸움을 펼치다 퇴장까지 당했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차별이 발생했다. 비니시우스가 레드카드를 받은 이유는 보복 행위 때문이었다. 발렌시아의 공격수 우고 두로가 목을 조르며 막아서자 화가 난 비니시우스가 가격으로 대응했다. 그런데 경기장 전광판과 중계 화면의 비디오 판독(VAR)에서는 비니시우스의 난폭 행위만 송출됐다. 폭력을 유발한 장면은 자르고 가격 행위만 반복해서 틀었다. 비니시우스에게는 퇴장 징계가 내려졌지만 두로에게는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비니시우스는 경기 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장문의 글과 사진, 영상을 올렸다. ‘원숭이’를 외치는 팬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니폼을 입힌 인형을 마드리드 시내 다리 난간에 목매달아 놓은 섬뜩한 풍경도 공유했다. 그는 “인종차별은 스페인에서 평범하게 이뤄진다. 차별을 정상이라 생각하고, 상대는 그것을 부추긴다. 긴 여정이 되더라도 나는 끝까지 인종차별에 맞서 싸울 것이다”라며 투쟁을 선언했다.
이어진 홈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은 비니시우스의 등번호 20을 새긴 유니폼을 맞춰 입고 섰다. 관중석에는 ‘우리는 비니시우스와 하나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리고 선수들은 “우리 모두가 비니시우스다”라고 외쳤다. 브라질은 정부 차원에서 대응했다. 룰라 대통령이 일본에서 열린 G7 회의에서 “국제축구연맹(FIFA)이 즉각 조치를 취하라”고 입장을 발표했다. 스페인 라리가 사무국의 자세도 바뀌었다. 비니시우스의 과도한 대응이라며 관망하던 입장에서 “6개월 내로 인종차별에 대한 해법을 내겠다”라며 진화에 나섰다. 이것은 대표 사례일 뿐, 지난 2년 동안 비니시우스와 엮인 인종차별 사례는 드러난 것만 10여 차례에 이른다.
아시아 축구를 대표하는 최고 스타 손흥민 역시 지속적으로 인종차별적 견제와 고통에 시달린다. 상대 팬이 손흥민을 향해 손가락으로 눈을 찢는 시늉을 해 보이는 것은 거의 일상이다. 스카이스포츠의 유명 해설가 마틴 타일러는 손흥민의 과감한 태클을 두고 “무술(martial arts)을 했다”라고 발언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백번 양보해 상대 팬들은 다분히 도발적인 의도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고상한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자리에서 드러나는 편견은 그래서 더 무섭다. 차별인 줄도 모르는 차별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행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팀 동료도 예외는 아니다. 로드리고 벤탄쿠르의 발언이 그런 사례다.
벤탄쿠르는 우루과이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인을 싸잡아 비하했다. 진행자가 “한국 선수(손흥민) 유니폼을 줄 수 없냐”라고 묻자 “손흥민 사촌의 유니폼은 어떤가? 어차피 그쪽 사람들은 다 똑같이 생겼다”라고 대꾸했다.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자 “나쁜 농담이었다. 나는 손흥민을 정말 좋아한다”라며 수습에 나섰다. 결국 손흥민이 직접 등판해 “벤탄쿠르와 대화했다. 실수였고, 사과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토트넘 구단도 벤탄쿠르에게 징계를 내리는 대신 별도의 교육을 진행할 것이라는 입장으로 사태를 마무리하려 애썼다. 벤탄쿠르는 올여름 한국에서 진행되는 프리시즌 투어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유럽 축구는 오랫동안 전 세계 축구 산업을 지배해왔다. 시장이 커진 만큼 다양한 인종과 민족에 대해 ‘정치적 올바름’을 표방하고 있다. UEFA를 비롯한 각종 단체와 구단들은 인종차별 논란에 어떤 형태로든 대응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종차별에 몰지각한 이가 경기장 내에 존재하는 한 이 문제는 돌림노래처럼 반복된다. 주류 무대에서 뛰는 아시아 선수들이 늘어나면서 그 타깃이 아프리카 혹은 남미 출신 흑인 선수에서 아시아 선수로 옮아갔을 뿐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선수들이 실력과 명성으로 방어막을 만들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웃을 수 없는 현실이다. 다양성과 평등 그리고 포용이라는 가치를 그라운드 위에서 실현하는 길이 험난해 보인다. 인종차별은 결코 농담이 될 수 없다.
배진경 (<온사이드> 편집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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