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전 세계의 원전 회귀, 한국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오윤희 국제부장 2024. 8. 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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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탈(脫) 원전 국가 이탈리아가 1990년 원자력 발전소를 폐기한 이후 35년 만에 원전을 재가동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질베르토 피케토 프라틴 이탈리아 환경에너지부 장관은 지난달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10년 안에 소형 모듈형 원자로(SMR)가 가동될 수 있도록 SMR 투자 허용 법안을 발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970년대까지 활발하게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했던 이탈리아 정부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가 터진 이후 원전 폐기로 방향을 틀었다. 당시 국민투표에서 이탈리아 국민 80%가 탈원전을 지지했을 정도로 ‘원자력 발전소는 위험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고, 다른 유럽 국가들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하지만 최근엔 원전에 심한 거부감을 보였던 유럽 국가들 분위기가 바뀌는 추세다. 영국은 작년 원자력청을 신설하면서 2050년까지 원전 용량을 현재의 4배로 늘리기로 했다. 1980년에 일찌감치 단계적 탈원전을 선언했던 스웨덴도 “2045년까지 원전 10기를 건설하겠다”라고 표명했고, 루마니아는 지난달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서 신규 원전 2기 프로젝트를 승인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체코·폴란드·슬로베니아·헝가리·튀르키예· 네덜란드·핀란드 등 거의 대부분 유럽 국가들이 원전 건설 계획을 도입하면서 유럽은 탈원전에서 ‘원전 부활’로 돌아서는 모양새다.

사실 이 같은 분위기는 지난 3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원자력 정상회의’에서도 확연히 감지된 바 있다. EU 의장국 벨기에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공동으로 개최한 이 회의는 원전의 역할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유럽에서 원자력에만 초점을 맞춘 정상급 회의가 열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외신들은 이날 행사를 두고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행사”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탈원전에 앞장섰던 유럽 국가들이 하나씩 원전을 수용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 급성장, 전기차 전환 등으로 인한 전력 수요 폭증이다. 생성형 AI 서비스의 전력 소모량은 기존 인터넷 서비스보다도 10배 이상 많다. 수급이 불안정한 신재생에너지만으로는 갑자기 늘어난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역부족이다. 저탄소 청정에너지원인 원전에 기대지 않고선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점 역시 이들 국가들이 다시 원전으로 눈을 돌린 원인 중 하나다. 여기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 전쟁이 길어지면서 에너지 안보 위기에 직면한 유럽 국가들의 불안감도 원전으로 회귀하는데 한몫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 정부가 지난달 총사업비 30조원에 달하는 체코 원전 4기 수주에서 성공한 것은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힘입은 바 크다. 지난 2014년, 착공 3년 만에 UAE 바라카 원전 1호기를 설치 완료해 ‘온 타임 온 버짓(On Time On Budget·정해진 예산으로 적기 시공)’ 역량을 세계 원전 업계에 알렸던 한국으로선 전 세계적인 원전 회귀 움직임이 앞으로 커다란 기회가 될 수 있다. 미 상무부는 글로벌 원전 시장이 10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한투자증권은 현재 건설 중이거나 건설이 계획된 글로벌 신규 원전 용량은 2030년까지 61기가 와트(GW)에 이르고, 그 후로도 원전 수요는 계속 커져 2050년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원전 발전용량은 현재의 2배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만약 한국이 이러한 흐름에 제대로 올라탄다면, 원전은 우리의 차세대 먹거리로 부상(浮上)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지난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말라죽기 직전까지 갔던 국내 원전 생태계에 가까스로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아직도 회복 수준까지 도달한 것은 아니다. 탈원전 기간 동안 많은 관련 중소기업들이 도산했고, 업계에서 이탈한 인력 역시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당장 해결하기 어렵다 치더라도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손을 쓸 수 있는 관련 법안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실정이다.

사용 후 핵연료 저장 시설을 짓기 위한 ‘고준위방사성폐기물 특별법’은 21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고, 현 22대 국회에서도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여야가 무의미한 정쟁만 계속하는 동안, 체코 원전 수주로 간신히 한시름 놓은 국내 원전 업계는 또다시 위기에 몰릴 수도 있다. ‘그린 택소노미(Green Taxonomy) ‘를 통해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 활동 범위를 규정한 EU가 원전의 경우 2050년까지 고준위 방폐장을 확보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이 하루빨리 고준위 특별법을 제정하지 못할 경우, 향후 대(對) 유럽 원전 수출에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정치권을 보면 아직도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지난 6월 개원한 22대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를 도출한 민생 안건은 놀랍게도 0건이다. 정치권이 이념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미래의 비전을 잃어버리면 그 나라 경제·산업은 시들어간다. 우리는 이미 지난 정부 때 탈원전 논란을 통해 한차례 그런 경험을 한 바 있다. 국가의 미래를 해칠 수도 있는 뼈아픈 실수를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되풀이해선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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