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에 진심? 칼국수에 진심!…대전으로 ‘후루룩’ 칼국수 여행 떠나볼까
“대전 사람들은 칼국수를 매일 먹는다는 게 사실이야?”
대전 출신인 내게 사람들이 가끔 물어오는 질문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매일 먹지는 않고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먹는다. 다른 지역에선 그 정도로 칼국수를 먹지 않는다는 걸 대전을 떠나고서야 알았다. 맞다. 대전에는 칼국숫집이 많고 대전 사람들은 칼국수를 많이 먹는다. 언제 먹어도 맛있었던 추억의 칼국숫집을 떠올리며 한여름 대전 칼국수 여행을 떠났다.
칼국수가 있던 풍경
대전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나에게 칼국수는 일상의 풍경 같은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 근처 분식집에서 얼큰이칼국수와 김밥을 먹었고, 은행동 ‘시내’에서 친구들을 만날 때면 매콤한 두부두루치기나 주꾸미볶음에 칼국수 사리를 비벼 먹었다. 혀가 얼얼하게 매운 두루치기 양념과 이제 막 끓는 물에서 건져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칼국수면의 조합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맛있어서 먹을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났다.
집에서도 칼국수를 자주 해서 먹었다. 주말이면 나와 동생은 밀대를 쥐고 엄마가 만든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었다. 쿠키 대신 칼국수면을 만들며 자란 셈이다. 엄마는 얇게 밀린 밀가루 반죽을 둘둘 말아 도마에 올려놓고 부엌칼로 칼국수면을 썰었다. 뚝, 뚝. 뽀얀 밀가루를 뒤집어쓴 반죽이 단단한 소리를 내며 면으로 변신했다. 대전 아이들은 ‘칼국수’가 ‘칼이 들어 있는 국수’가 아니라 ‘칼로 잘라 만든 국수’라는 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았다.
집집마다 즐겨 먹는 칼국수 스타일도 달랐다. 우리 집은 진한 멸치육수에 양파와 감자, 애호박을 넣고 뭉근하게 끓였다. 펄펄 끓는 육수에 칼국수면을 넣고 기다리면 곧 삐뚤빼뚤 오동통한 국수가 그릇에 푸짐하게 담겨 나왔다. 얼큰한 걸 좋아하는 아빠는 다진 고추나 양념장을 넣어 드셨다.
칼국수는 계절이나 날씨, 사람을 가리지 않고 먹는 음식이었다. 비가 와도, 날이 더워도, 처음 만난 사람과도 칼국수를 먹었다. 여름이면 “더운데 칼국수나 먹으러 가자”며 칼국숫집을 찾았다. 덥다면서 먹은 건 냉면도 콩국수도 아닌 뜨끈한 멸치칼국수였다. 맨 처음 서울에 올라와 동네에 갈 만한 칼국숫집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땐 적잖이 당황했다. 대전에서 태어난 나는 칼국수를 원 없이 먹고 자란 ‘밀가루 수저’였던 셈이다. 어렸을 때 먹은 음식은 평생 그리운 맛이 된다고 하지 않나. 칼국수는 언제나 먹고 싶은 음식이 됐다.
인구 1만명당 칼국숫집 5개…빵만큼 칼국수 많이 먹는 도시
“요즘 칼국수 먹으러 어디로 가?” 밀가루 수저로 태어나 상경한 지 어언 20년. 최신 칼국수 맛집 정보를 얻기 위해 대전에 사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메시지창 질문에 숫자 1이 사라지자마자 상호가 쏟아진다. 모두 제각각이다. 대전 경계를 넘어 공주 계룡산 근처 칼국숫집도 등장한다. 대전 사람들에겐 공주, 세종, 청주 등 범충청권이 칼국수 생활권이다.
사실 대전 사람에게 가장 맛있는 칼국숫집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속 시원한 답을 듣기 어려울 수 있다. 부산 사람에게 가장 맛있는 돼지국밥집을 묻는 것과 비슷하달까. 동네마다 오래 장사해온 칼국숫집이 두어 군데쯤 있다 보니 가까운 곳이 단골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대전엔 칼국숫집이 많고 칼국수를 먹는 사람도 많다.
대전이 ‘칼국수 도시’라는 건 통계로도 증명된다. 대전세종연구원이 인허가 데이터 등을 기반으로 전국의 칼국수와 빵 가게 수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2023년 말 기준 대전의 칼국수 가게는 700개가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인구 1만명당 5개꼴로, 서울(3개), 부산(3.9개), 대구(4.5개) 등 7개 특·광역시 가운데 가장 많다. 칼국수 간판을 내건 집뿐 아니라 일반음식점이나 분식집 등에도 칼국수 메뉴를 갖춘 곳이 많기 때문에 실제 칼국수를 파는 곳은 1000곳을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전 근대화와 함께 번성…팔도 맛 녹아들어 다양
대전에 이처럼 칼국숫집이 많은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밀가루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시절 교통의 요지였던 대전에 밀가루가 모이게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1905년 경부선, 1914년 호남선 개통으로 철도 물류의 거점이 된 대전이 한국전쟁 이후 밀가루를 비롯한 구호물자의 집산지 역할을 했는데 이를 기반으로 빵, 칼국수 등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1960~1970년대 서해안 간척사업 등 굵직한 국가사업에 동원된 노동자들에게 노임으로 돈 대신 밀가루가 지급되며 대전이 밀가루 유통의 중심지가 됐다는 설도 있다. “노동자들이 받은 밀가루를 대전역 주변에서 되팔며 자연스럽게 대전에 밀가루가 퍼지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미군 부대 근처에서 미군 용품이 유통되던 것과 비슷한 형태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대전 칼국수축제를 주최해온 대전중구문화원의 박경덕 사무국장의 말이다. 실제로 대전역 앞 중앙시장을 비롯한 인근 상권에는 수십년 역사를 지닌 유명한 칼국숫집이 여럿이다.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다른 음식에 비해 식자재 단가가 저렴한 덕에 누구나 간단한 요리 실력만 갖추면 어렵지 않게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대전에 칼국수가 널리 퍼진 이유로 꼽힌다. 지금에야 밀가루가 몸에 좋지 않다며 적게 먹으려 하지만 모두가 배고팠던 시절 전쟁과 가난을 피해 대전에 정착한 이들에게 칼국수는 적은 돈으로 푸짐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이었다.
1961년 대전 동구 정동에서 시작한 ‘신도칼국수’는 본래 냉면집을 하던 창업주 김상분 할머니(작고)가 대전역 앞 짐꾼과 마차꾼 같은 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음식을 고민하다 칼국수로 업종을 변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역 근처는 고향을 떠나 온 사람과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올라온 이들이 모여 살던 곳이기도 했다. 당시 커다란 양푼 냄비에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담긴 칼국수 1인분 값은 단돈 30원이었다. 세월이 지나며 가격도, 그릇 크기도 달라졌지만(2024년 8월 기준 가격은 7000원), 신도칼국수는 그 맛 그대로 63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멸치, 사골, 얼큰이, 어죽…골라 먹는다
대전 칼국수는 종류가 다양하다. 멸치육수나 사골 국물에 끓여 내는 일반 칼국수를 기본으로 매운 양념장이나 고춧가루를 풀어 만든 얼큰이칼국수, 바지락칼국수, 어죽칼국수, 들깨칼국수, 팥칼국수, 비빔칼국수 등 재료와 조리법에 따라 그 종류가 20가지 이상이다. 팔도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니 각 지역의 레시피와 고유한 식재료가 대전 칼국수에 녹아들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 대전 전체 인구 중 ‘대전 토박이’의 비율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니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워낙 많고 다양해 대전의 ‘대표’ 칼국수로 한 가지를 꼽을 수는 없지만 1954년 문을 연 ‘대선칼국수’와 1961년 시작한 ‘신도칼국수’는 반세기를 뛰어넘는 전통을 가진 대전 칼국수의 원조 격이라 할 만하다. 세월이 증명하는 내공이 칼국수 한 그릇에 그대로 담긴다. 두 곳 모두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깊고 진한 맛을 낸다.
‘공칼(공주칼국수)’로 불리는 대전 얼큰이칼국수의 원조, ‘공주분식’도 빼놓을 수 없다. 1974년 중구 대흥동에 문을 연 ‘공주분식’은 얼큰한 맛으로 대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매운 칼국수를 유행시켰다. 통영산 질 좋은 멸치로 육수를 우려내고 고춧가루와 간장 등을 배합해 만든 양념장을 풀어 국물을 만드는데, 여기에 달걀을 풀고 김가루와 깨소금을 듬뿍 뿌려 쑥갓과 함께 낸다. 칼칼하면서도 속이 편안하게 풀리는 맛이다. 30년 넘게 대흥동에서 자리를 지키던 공주분식은 2009년 대흥동 재개발로 문을 닫았지만 얼큰이칼국수는 여전히 대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개그맨 이영자씨가 TV 예능프로그램에서 맛집으로 소개한 ‘복수분식’도 얼큰이칼국수의 계보를 잇는 곳이다. 대전엔 칼국수를 주 메뉴로 하면서도 ‘분식’ 간판이 붙은 집들이 있는데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분식이라 부르던 시절 옛 간판을 그대로 사용하는 곳들이다. 그런 집들은 오래된 맛집일 확률이 높다.
두루치기, 김밥, 탕수육과도 찰떡궁합
곁들여 먹는 음식이 다채로운 것도 대전 칼국수의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칼국수와 함께 먹는 수육, 보쌈, 만두뿐 아니라 김밥, 탕수육, 두부·오징어 두루치기, 주꾸미볶음도 칼국수와 짝꿍이 된다. 특히 매콤한 두루치기나 주꾸미볶음을 먹은 후 남은 양념에 칼국수면을 비벼 먹는 것은 대전 사람들이 칼국수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대흥동 ‘진로집’이나 선화동 ‘광천식당’, 월평동 ‘동원칼국수’에서는 두부두루치기나 오징어두루치기와 칼국수를 함께 먹는다. 두루치기를 웬만큼 먹고 난 후 1500~2000원 정도 하는 면사리를 시켜 남은 양념에 비벼 먹는다. 면사리를 따로 시키지 않고 칼국수면을 건져 비벼 먹어도 된다. 단맛이 적고 칼칼한 두루치기 양념에 달큼하게 간이 된 칼국수면을 비비면 감칠맛이 두 배. 먹음직스럽게 비빈 칼국수면을 후루룩 배 안으로 흘려보낸 후 담백하고 시원한 칼국수 국물로 매운 속을 달래고 나면 한여름에도 개운하게 스트레스가 풀린다. 어디든 국수를 넣어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샤부샤부 등 전골 요리를 먹고 난 후 국물에 칼국수를 끓여 먹는 방식이 대전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바지락, 동죽 등 조개가 들어간 칼국수도 즐겨 먹는다. 맑은 육수에 칼국수면과 바지락, 호박이나 쑥갓이 전부인데 국물맛이 깊고 시원해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충남에서 전북까지 해안선이 길게 발달한 데다 서해안 갯벌에서 공수해 온 신선한 바지락이 깊은 맛을 내는 덕이다. 동구 삼성동의 ‘오씨칼국수’는 ‘물총’으로 불리는 동죽조개 칼국수로 유명하다. 신선한 서해안 동죽에 청양고추를 넣어 시원하고 매콤하게 끓여낸 물총 조개탕은 이 집의 인기 메뉴다.
중구 태평동에 위치한 ‘갯벌바지락손칼국수’와 신탄진 ‘부추해물칼국수’는 지역민들이 찾는 ‘현지인 맛집’이다. ‘갯벌바지락손칼국수’는 매일 전북 고창에서 공수해온 신선한 바지락을 쓰는데 바다향을 품은 진한 바지락 맛이 일품이다. 양도 푸짐해서 여럿이 먹기에도 좋다.
대전 중앙로에 있는 ‘손이가어죽칼국수’는 텁텁하지 않고 담백한 어칼국수로 인기가 높은 신흥 칼국수 강자다. 어죽, 어탕을 싫어하는 이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맛. 보쌈과 족발, 매운탕과 미꾸라지튀김 등이 적힌 메뉴판엔 오묘하게 ‘찰탕수육’이 끼어 있는데 본래 짜장면집을 했던 사장님이 남겨둔 메뉴다. 민물향을 품은 구수한 어칼국수와 새콤한 찹쌀 탕수육이 신기하게 어울려 웃음이 난다. 대전 유성구 하기동에 있는 ‘오시오칼국수’는 들깨수제비 맛집으로 꼽힌다. 멸치와 황태, 사골을 우려낸 육수에 들깨를 듬뿍 넣어 담백한 맛을 낸다. 대전 중심부와 꽤 거리가 있는데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칼국수 먹고 성심당으로…대전 찾는 MZ들
최근 대전에 ‘빵지순례’를 오는 여행객들이 많아지며 덩달아 칼국숫집을 찾는 이들도 늘었다. 지난달 30일, 대전역 인근 한의약특화거리에 위치한 ‘김화칼국수’ 앞에는 3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줄이 길게 늘어섰다. 캐리어를 끌고 배낭을 멘 여행객도 여럿이었다.
30년 업력의 ‘김화칼국수’는 나이 지긋한 단골들 못지않게 대학생과 젊은 직장인들이 매일 줄을 서는 곳이다. 칼국수와 수육, 비빔국수, 선짓국밥 등 메뉴가 다양한데 가장 비싼 메뉴가 1만5000원짜리 수육 대(大)자다. 진한 멸치육수에 들깻가루와 김가루를 올린 칼국수가 6000원, 쫄깃한 면에 채를 썬 양배추를 올려 새콤달콤한 양념에 비벼 먹는 비빔국수(7000원)도 별미다. 여기에 딱 어울리는 수육 소(小)자가 단돈 1만원. 맛있는 데다 가격도 저렴하니 삼복더위에 줄을 서는 이유가 설명된다.
자리에 앉자마자 재빨리 칼국수와 비빔국수, 수육을 시켰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폴폴 나는 비빔국수를 슥슥 비비다 문득 옆자리에 앉은 여행객들이 궁금해졌다. 서울에서 1박2일 여행을 왔다는 두 청년은 대전역에 내리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단다. “이 더위에 줄 서서 먹을 만해요?” 날도 더운데 대전까지 와서 고생만 하다 가면 어쩌지, 조심스레 물은 질문에 만족감 가득한 대답이 돌아왔다. “너무너무요. 서울에서 요즘 이 가격에 이렇게 먹을 수 있는 곳이 없어요. 맛있는 데다 가격도 싸요. 덥다고 줄 안 섰으면 후회할 뻔했어요.”
대전의 오래된 칼국숫집 상당수가 대전역 인근과 중구 원도심에 밀집해 있다. 짧은 일정이라면 대전역에 내려 칼국수 먼저 먹고 여행을 시작하자. 대부분 오후 3시~4시30분 사이 휴식 시간을 가지니 미리 시간을 체크해보고 가는 것이 좋다. 칼국숫집 테이블 위에 청양고추나 땡초 등을 섞어 다진 고추양념이 있다면 함께 넣어 맛보자.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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