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 급감에 1년여 발령 대기... ‘웨이팅게일’ 된 간호사들
올 초 서울 A대학 간호학과를 졸업한 강모(22)씨는 최근 부모 집이 있는 대구의 한 음식점에 취업해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는 작년 8월 서울 한 빅5(주요 5대) 병원에 합격했고, 올 1월 간호사 국가시험을 통과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출근하라는 연락이 오지 않아 현재 8개월째 발령 대기 중인 이른바 ‘웨이팅(waiting)게일’이다. 웨이팅게일이란 영국 간호사 나이팅게일에 빗대 신규 간호사로 뽑히고도 병원 사정 때문에 발령을 못 받고 계속 기다리는 이들을 가리키는 간호계 은어다.
강씨는 “병원에 언제쯤 발령받을 수 있는지 물어도 ‘모른다’는 답만 돌아왔고,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일단 고향에 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병원에서 간호사 경력을 쌓지도 못하고 시간만 흘려 보내고 있다”며 “간호사 꿈을 가진 뒤 처음으로 진로 선택을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2월 전공의 집단 이탈 후 대형 병원들이 경영난에 직면하면서 간호사 취업 절벽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대형 병원 120여 곳에 합격해 올해 발령 예정이던 간호사 1만2000여 명 가운데 실제 근무를 시작한 간호사는 2000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 초 간호사 시험까지 통과하고도 아직 발령을 못 받은 이가 80%가 넘는 것이다.
한 요양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B간호사는 “발령 대기자 중 많은 이가 병원이 아닌 편의점·음식점·호텔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일부는 필라테스 강사같이 아예 다른 진로를 택하는 경우도 봤다”고 했다. 발령 대기 기간 미국 간호사 면허 시험인 ‘엔클렉스(NCLEX)’를 준비하는 간호사도 늘고 있다. 간호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전공의 빈자리를 전문의와 간호사로 채우겠다면서도 간호사 고용 문제와 관련해 아직 어떤 대책도 제대로 내놓지 않고 있다”며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겠다는 꿈을 가졌던 많은 간호사와 예비 간호사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있다”고 했다.
정부는 전공의 집단 이탈 후 진료 지원(PA) 간호사를 현재 1만3000여 명에서 약 2만명까지 대폭 늘리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전공의 빈자리를 PA 간호사와 전문의로 대체해 상급종합병원 구조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공의 이탈 후 수술·진료 감소로 병원 경영난이 갈수록 가중돼 현재 배출되는 간호 인력도 현장에 배치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먼 얘기다.
대형 병원은 매년 상반기에 신규 간호사 모집 공고를 내고, 하반기에 채용 절차를 진행한다. 합격자들은 이듬해 1월 간호사 국가시험에 합격하면 3월부터 순차적으로 발령을 받는다. 하지만 간호협회에 따르면 전국 47곳 상급종합병원 간호사 수는 올해 3월 말 기준 7만2994명에서 6월 말 7만2800명으로 오히려 194명 감소했다. 이 기간 간호사 숫자가 줄어든 것은 이례적이다. 간호협회 관계자는 “보통 3~6월은 간호사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는 시기인데, 올해는 오히려 줄어든 것”이라며 “2월 전공의 이탈 후 병원들이 신규 간호사 채용·교육 비용을 아끼고 기존 간호 인력을 최대한 활용하려 하면서 신규 간호사 발령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매년 2만3000여 명 배출되는 간호사 면허 취득자 대부분은 언제 취업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깜깜이’ 상황에 놓인 것이다.
지난해 수도권 한 상급종합병원에 합격한 C간호사는 올 초 병원에서 “3월부터 출근할 것”이란 말을 듣고 병원 근처 오피스텔을 얻었다. 하지만 의정 갈등 사태 후 발령이 무기한 미뤄지면서 결국 보증금은 포기하고 고향 전남으로 내려가 동네 병원에 취업했다. 서울 대형 병원에서 일하는 D간호사는 “2022년 병원 채용 합격자 중에도 아직 대기하는 이들이 있다”며 “대기자들은 경력 단절이 길어지면서 불안해하고, 졸업을 해야 하는 후배들은 취업 걱정으로 불안에 떨고 있다”고 했다.
작년에는 대형 병원 채용 전형이라도 열렸지만, 의정 사태가 터진 올해는 대다수 대형 병원이 내년에 현장에 배치할 신규 간호사도 뽑지 않는다. 올해 수도권 상급종합병원 23곳 중 내년을 위해 신규 간호사 채용을 공고한 곳은 중앙대병원 한 곳뿐이다. 지역에선 강원대병원이 올해 신규 간호사 80명을 뽑는데 1679명이 지원해 21대1 경쟁률을 기록했다. 작년 이 병원의 경쟁률은 3.4대1이었다.
현재 병원을 지키고 있는 간호사들도 문제다. 서울아산병원 등 일부 대형 병원은 경영 사정이 나빠지자 간호사를 비롯한 일반직 직원을 대상으로 무급 휴직 신청을 받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은 40일간의 무급 휴직 신청을 받다가 최근 이 기간을 80일로 확대했다. 기존 간호 인력은 업무 부담 가중으로 극도의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병동 통폐합 등으로 완전히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E간호사는 “일을 그만두고 싶은데, 채용 시장이 어떻게 될지 몰라 일단은 힘들어도 버티고 있다”고 했다.
의료계에선 발령을 기다리고 있는 ‘웨이팅게일’들이 일부 해외로 눈을 돌릴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지난달 27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싱가포르 의료인 채용 설명회’에는 의사 200여 명뿐만 아니라 간호사 100여 명도 참석했다. 미국 간호사 면허 시험(엔클렉스) 인기도 늘었다. 의정 갈등 이전엔 시험 신청부터 승인까지 약 2개월이 걸렸는데, 최근엔 이 대기 기간이 3~4개월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한 간호사 커뮤니티에선 “엔클렉스 생각 있으면 대기부터 걸어야 한다” “명절 고속도로처럼 엔클렉스 신청도 몰리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한 간호사는 “언제 입사할 수 있을지 아무 기약 없이 인생 계획도 못 세운 채 기다려야 한다는 게 문제”라며 “싸운 건 의사와 정부인데, 간호사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다. 한꺼번에 간호사 2만여 명씩 뽑아 대기시키면서 필요할 때만 찔끔찔끔 갖다 쓰는 상황을 보면 우리나라의 간호사 대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런 가운데 간호사 단체인 행동하는 간호사회는 9일 “무급 휴직, 신규 채용 잠정 중단, 과중한 업무가 의료 대란 속 현장을 지키고 있는 간호사들이 받은 대가”라며 “정부는 간호사 취업 대란부터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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