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 ‘총-칼-활’ 파리 올림픽 활약 뒤 키다리 아저씨들 양궁-펜싱-사격 금메달 10개 따내… 현대차-SK 등 장기 후원이 일조 정의선 회장, 선수촌에 장어 배달… 회사 기술로 훈련용 양궁로봇 개발 최신원 회장은 파리 올림픽 방문… 펜싱 경기 응원하다 코피 흘리기도 작년, 사격연맹 회장사 물러난 한화… 선수단 창단 등 20년 넘게 애정
《양궁, 펜싱, 사격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2024 파리 올림픽’에서 합작한 금메달만 무려 10개. 최고의 활약을 선보인 이들 종목의 공통점은 ‘든든한 뒷배’가 있다는 것이다. 양궁은 현대자동차가, 펜싱은 SK가, 사격은 한화가 각각 20∼40년씩 협회 회장사를 맡아 오며 오랜 기간 버팀목이 돼 줬다. 스포츠계의 ‘키다리 아저씨’들이 어떤 방식으로 선수들을 도와줬는지 유형별로 쪼개 알아봤다.》
● 유형1: 세심 지원 끝판왕
40년간 대한양궁협회 회장사를 맡아온 현대자동차그룹의 정의선 회장은 지난달 13일 충북 진천선수촌에 장어 요리와 함께 등장했다. 양궁 대표팀의 프랑스 출국을 사흘 앞둔 시점이었다. ‘2021 도쿄 올림픽’ 당시 양궁 대표팀 선수들이 장어를 맛있게 먹었는데, 이것을 잊지 않고 다시 공수해 온 것이다. 오전에 미리 도착한 정 회장이 선수들의 훈련 과정을 지켜본 뒤 점심시간에 선수단에 장어 요리를 대접해 ‘몸보신’을 시켜 준 것이다.
장어 요리 배달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 진행됐다. 서울에서 1시간 30분가량 걸리는 진천선수촌까지 공수하는 과정에서 음식이 상하거나 맛이 없어지는지 등을 장어덮밥집이 전날 미리 실험해 본 것이다. 음식을 넉넉하게 2시간가량 차에 넣고 운행한 뒤 확인해 보니 문제가 없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둔 선수들이 괜히 탈이 나면 안 되기 때문에 음식점에서도 극도로 신경을 쓴 것이다.
장영술 대한양궁협회 부회장은 “본업만 해도 일정이 너무 바쁜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셨단 것에 선수들과 코치진이 정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정 회장의 ‘디테일 뒷바라지’는 지난해 6월에도 목격됐다. 올림픽이 열리기 1년도 더 남은 시점에 정 회장이 양궁 대표팀의 휴식 공간을 미리 방문해 직접 하나하나 확인한 것이다. 해당 휴식 공간은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를 위해 인근 호텔 2층을 통째로 빌린 것이었다. 당시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 경제사절단으로 따라간 정 회장은 오전에 바쁜 시간을 쪼개 휴식 공간의 숙소나 주방 등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폈다. 또 정 회장은 호텔에서 경기장까지 약 200m 거리를 직접 걸어보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확인하는 등 불편함이 없는지를 두루 살폈다.
● 유형2: 내가 바로 ‘찐팬’
이번 올림픽 기간 동안 회장님들은 기업 수장이 아니라 해당 종목의 ‘찐팬’(진짜 팬)으로 변신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슬쩍 경기장에 들르는 것이 아니라 관중석에서 며칠에 걸쳐 거의 모든 경기를 다 응원하는 것이다. 대기업 대표님의 얼굴로 근엄하게 앉아 있기보다는 환호성을 내지르고 박수를 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를 하는 등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
대한펜싱협회장을 맡은 최신원 전 SK네트웍스 회장은 파리 올림픽 기간 동안 응원을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코피까지 쏟았다. 지난달 25일 프랑스 현지에 미리 도착해 한국 대표팀의 펜싱 경기를 빠짐없이 챙기던 최 회장은 어느 날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던 중 코에서 피가 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70대 나이의 최 회장이 피를 흘리자 펜싱협회 관계자들은 “들어가서 쉬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으나, 최 회장은 잠깐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등장해 열성적으로 펜싱 대표팀을 응원했다. 펜싱협회 관계자는 “최 회장님은 관중석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스타일”이라며 “구본길이나 김정환 선수 결혼식에도 직접 참석하는 등 회장님이라기보다는 마치 아버지처럼 선수들을 챙긴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적어도 올림픽 기간만큼은 ‘자동차인(人)’이 아니라 ‘양궁인’이었다. 양궁 대표팀의 모든 주요 경기를 다 현장에서 직접 관람했다. 경기 전에는 경기장에 들어가는 선수들에게 따듯한 말을 건네며 하이파이브를 해주고, 경기가 시작되면 관중석에서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응원했다. 양궁 남자 단체전 결승 상대가 개최국 프랑스로 정해지자 정 회장은 남자 선수들에게 “홈팀 응원이 많은 것은 당연하겠지만 주눅 들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하자”고 격려했다. 또 대표팀의 맏언니로 후배들을 살뜰하게 챙긴 전훈영이 여자 선수 중 유일하게 개인전 메달 획득에 실패하자 정 회장이 따로 찾아가 고생했다고 위로하며 다독이기도 했다.
● 유형3: 회사 기술력 총동원
선수들이 체계적인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회사의 기술 역량을 총동원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차는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개발 기간을 1년 들여 ‘개인 훈련용 슈팅로봇’을 따로 만들었다. 양궁장의 바람을 읽고 스스로 활을 쏘는 로봇이다. 웬만한 로봇이라면 ‘신궁’에 가까운 한국 양궁 대표팀 선수들에게 상대가 안 되겠지만 현대차가 만든 슈팅로봇은 10점 만점에 평균 9.65점을 쏠 정도로 ‘고수’다. 만약 대표팀 선수들이 혼자서도 실전과 같은 맹훈련을 하고 싶다면 슈팅로봇을 상대하면 된다.
또한 현대차가 개발한 첨단 원단을 적용한 ‘복사냉각 모자’를 선수들에게 제공했다. 해당 모자는 직사광선의 반사를 극대화해 주변 환경에 비해 온도를 현저히 낮추는 효과가 있다. 현대차 의왕연구소에서 제작된 해당 원단은 향후 현대차 양산 모델의 외부 햇볕을 차단하는 데 적용될 계획이다. 신상훈 현대차 글로벌전략본부(GSO) 신사업전략2팀 팀장은 “비용보단 오직 선수들이 뭐가 필요한지에 대해 고민해 훈련 도구를 제작한다”고 말했다. 서은석 신사업전략2팀 책임매니저는 “향후 디지털 풍항계를 만들어 선수들이 정확한 수치를 보면서 바람 적응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연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코오롱그룹도 자사의 의류 브랜드인 ‘코오롱스포츠’를 통해 양궁 대표팀을 지원했다. 코오롱은 지면 접지력이 좋은 소재를 활용한 양궁 전용화를 국내 최초로 개발해 제공했다. 또 유니폼에는 활시위를 당길 때의 팔 움직임을 고려한 ‘3차원 패턴 기술’을 적용해 선수들이 기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 유형4: 저변까지 키우기
지난해 말까지 20년 넘게 대한사격연맹의 회장사를 맡으며 200억 원 이상을 지원한 한화그룹은 사격 저변 확대에 특히 힘을 쏟았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강초현이 소속팀을 찾지 못하자 한화갤러리아사격단을 창단해 지원했다. 2008년에는 국내 주요 대회 중 하나인 한화회장배 전국사격대회를 만들어 지난해까지 꾸준히 운영해 왔다. 김 회장도 한화회장배 대회에 간간이 참석해 개회사나 시상을 하며 사격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대한사격연맹 관계자는 “2002년 한화그룹이 연맹의 회장사를 맡은 이후 동계 해외 전지훈련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선수들의 실력이 크게 향상됐다”며 “덕분에 진종오(현 국민의힘 의원)라는 걸출한 선수가 탄생했고, 이를 지켜보면서 성장한 후배 선수들이 이번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이라고 말했다.
펜싱도 SK그룹이 회장사를 맡은 뒤 동호회 인구가 크게 늘었다. 오완근 대한펜싱협회 사무처장은 “2000년대 초반 SK그룹이 펜싱협회 회장사를 맡기 전에는 펜싱 동호회 인구가 거의 없었는데 이후 협회에서 클럽대회를 여럿 창설하자 동호회가 활성화됐다”며 “지금은 펜싱클럽이 150개가 넘고, 동호인도 약 4000명에 이른다. 요즘은 동호인 대회를 열면 참가자가 예상치를 웃돌기 일쑤”라고 말했다. 오 처장은 “SK그룹에서 후원을 해준 덕에 한국 펜싱이 급성장하는 것을 다른 나라 펜싱 선수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며 “국제 대회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을 만나면 항상 엄청 부럽다고 이야기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살뜰하게 지원해 주던 기업이 갑자기 떠나면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한화그룹이 지난해 말 회장사 자리를 내려놓자 경기 용인시에서 종합병원을 운영하는 신명주 회장이 대한사격연맹 회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해당 병원에서 임금 체불 신고가 대거 발생하며 논란이 일자 신 회장은 이달 6일 갑자기 대한사격연맹 회장직을 내려놓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신 회장이 올 6월 회장으로 선출된 지 불과 두 달 만에 다시 회장 자리가 공석이 될 처지다. 국내 사격계에서는 한화가 다시 등판해 주기를 내심 바라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체육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의 경영난이나 회사의 전략 변화 등을 이유로 후원이 갑자기 중단되면 아마추어 종목 선수들은 바로 어려움에 빠진다”며 “스포츠가 품은 긍정적인 힘을 오랜 기간 믿어주는 기업을 만나는 건 협회 입장에선 크나큰 행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