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추상 대가 이승조, ‘핵’의 평행선에 무한 영원을 담다
예술가와 친구들
이승조는 서울의 오산중학교에 입학했다. 전쟁 전의 오산학교는 평안북도 정주에 있었다. 시카고미술학교와 예일대 미술대학을 졸업한 임용련(1901~ ?),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한 백남순(1904~1994) 부부가 교사로 있었다. 이 부부는 오산학교 제자인 이중섭, 김창복(1918~2010) 등에게 그림을 지도했다. 김창복은 나중에 서울의 오산중고등학교 미술교사가 되었다. 이승조는 김창복의 지도를 받았다.
미술반 벽에 걸린 이중섭 그림 보고 분발
오산고 미술반 벽에 걸린 이중섭의 그림을 보고 분발한 이승조는 고교 3학년 때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했다. 1960년 이승조는 홍익대 서양화과에 들어갔다. 동기로 서승원, 최명영 등이 있었다. 대학생이 되었어도 자주 오산고를 찾아와 미술반 후배들을 지도하고 독려했다. 오산고교 미술반에는 박승범, 한만영 등의 후배가 있었다. 이승조의 5년 후배 한만영은 이승조의 독려 때문인지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전에 입선했다. 이승조는 한만영의 부모를 만나 한만영은 미대로 가야 한다고 설득하기도 했다. 특히 박승범은 이승조를 많이 따랐다. 둘이서 여성용 장신구를 만들어 팔아 학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일찍 세상을 뜬 이승조의 기일이 오면 빠지지 않고 박승범은 그의 산소를 찾아간다.
상도동의 집에서 돈암동의 성신여고까지는 꽤 멀었다. 지각이 가장 잦은 교사였다. 지각왕 이승조 선생이 들어오면 이제 교문을 닫아도 된다고 교감이 말했다. 이승조는 미술학원도 병행했다. 그 덕에 주머니가 제법 두둑했다. 심문섭과 이승조는 자주 술집을 찾았다. 현금이 있는 날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현금이 없는 날은 돈암동 단골 외상집을 전전하며 맥주를 마셨다. 음주량도 작업량도 대단했는데 기초체력이 약했다. 어린 나이에 용천에서 서울로 또 부산으로 떠돈 이승조다. 전쟁통에 잘 먹지 못한 탓이 컸다. 삼십대 후반에 만성간염 판정을 받았다.
성신여고 교사 시절 고정자를 만났다. 대전 출신으로 일곱 살 연하였다. 이승조는 고정자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결혼하자 말했다. 도수 없는 안경이라도 껴야 할 정도로 강렬한 이승조의 눈빛 속에서 고정자는 따뜻함과 순수함을 느꼈다. 1972년 이들은 부부가 되었다. 결혼 후는 미아리를 거쳐 삼선교로 이사를 왔다. 이승조는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강했다. 그 책임감은 작업에 대한 창작열과 상충했다. 학교에 안 나가고 그림만 그리고 싶었다. 이승조는 1978년 성신여고 교사를 그만 두었다. 1년 동안은 일체의 경제활동을 외면하고 그림만 그렸다. 살림이 궁핍해졌다. 값싼 정부미로 밥을 짓고 낱장 연탄을 사서 때웠다. 1981년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에 전임강사가 되면서 생활은 안정을 찾았다.
중앙대학교 교수진으로 성신여고 시절의 동료였던 심문섭, 홍익대의 입학 동기인 조각가 박석원 등이 합세했다. 이승조는 얼굴이 검은데다 머리카락은 학생들이 라면, 양배추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꼬불꼬불 난발이었다. 안성에 있는 중앙대 예술대학을 가려면 흑석동의 중앙대 본교에서 스쿨버스를 타야만 했다. 안성 입구 초소의 헌병이 버스에 올라와 승객들을 검문했다. 매번 인상이 강한 이승조만 검문에 걸렸다. 또 걸렸네 하며 동료 교수들이 웃었다. 나중에는 이승조도 은근히 검문 퍼포먼스를 즐겼다.
중앙대 근처 안성 보개에 건축가 문신규의 설계로 작업실을 만들었다. ‘핵’ 시리즈 작업을 하려면 1~2㎝ 폭의 테이프가 필요하다. 이승조와 동갑내기인 조각가 박석원이 갈 때마다 본 것은 작업 후 구석에 쌓아놓은 어마어마한 테이프 더미였다. 테이프 더미가 마치 커다란 입체작업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승조의 작업량은 압도적이었다. 기하학적 추상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림이 팔리기라도 했으면 힘들게 나가던 학교를 그만두었을 이승조다. 몸과 마음이 지치면 박석원과 함께 낚시터를 찾았다. 평안도 출신답게 냉면, 왕만두, 빈대떡을 좋아했다. 안성의 장안면옥을 자주 찾았다.
1988년에 미국여행을 떠났다.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귀국후 기존의 캔버스와 병행하여 새로운 재료인 스테인리스 스틸, 알루미늄, 동판, 나무 등의 패널 위에 ‘핵’ 시리즈를 그려나갔다. 그러나 그의 몸은 점점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승조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명나라 말기, 중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마테오 리치는 유클리트 기하학의 기하원본도 함께 전하고 번역했다. 동아시아에는 기하학적 정신이 없다. 무한과 영원에 대한 기독교적 각성에 기하학적 정신의 이해가 도움이 도움이 되었다. 이승조에게는 예외적으로 기하학적 정신이 있었다. 이승조에게 있어 기하하적 추상 작품은 곧 종교적 각성으로 이어졌다.
이승조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 오랫동안 조용하게 안성 작업실에 있었다. 작업실은 누군가의 관리가 필요한데, 장모가 그 역할을 자처했다. 고정자의 나이 세 살 때 경찰이던 부친이 6·25 전쟁터에서 순직했다. 연금이 나왔다. 이승조의 장모님은 그 연금으로 20년 이상 작업실을 유지, 관리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 덕분으로 작품의 상태가 오랫동안 깨끗하게 보존되었다.
이승조는 500호 이상의 큰 작품을 많이 남겼다. 생전에 그 정도 크기의 작품을 전시할만한 공간이 거의 없었다. 동숭동의 인공화랑이 5미터 이상의 층고로 이승조의 대형 작업과 딱 어울렸다. 황현욱대표와 전시 스케줄을 잡았는데 이승조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전시는 성사되지 않았다. 이승조의 뛰어난 역량이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게 늦어졌다.
2016년 파리의 페로탕 갤러리에서 열린 ‘오리진-박서보, 최명영, 이승조, 서승원’전에서 이승조의 작품이 각광을 받았다. 2020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이승조 회고전이 열렸다. 이어서 2022년 전시장의 공간감이 뛰어난 국제갤러리에서 이승조전이 열렸다. 이승조의 작품세계는 죽음을 넘어서서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이승조의 신념인 무한과 영원이 작품 ‘핵’의 평행선처럼 그와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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