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소수 정예로 최상의 성과 거둔 파리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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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등 본선 진출 실패 140명 미니 선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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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찬 2000년대생 맹활약, 역대급 메달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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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경쟁+꾸준한 지원 양궁 성공 본받아야
열대야를 잊게 했던 파리 올림픽이 11일 저녁(한국시간 12일 오전 4시) 폐회식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아무도 예상 못 한 반전의 드라마였다. 한국은 여자핸드볼을 제외한 단체 구기 종목에서 모조리 본선 진출에 실패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최소 규모인 21개 종목 140명으로 선수단을 꾸려야 했다. 으레 내세웠던 ‘10-10(금메달 10개 이상, 종합순위 톱10 진입)’보다 한껏 보수적으로 잡은 ‘금메달 5개, 종합순위 15위’가 이번 대회 목표였다. 엘리트 스포츠 선진국에서 추락할 것이라는 위기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남자 펜싱 오상욱과 여자 10m 공기권총의 오예진을 시작으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금메달을 따내며 ‘역대 최고의 성적’을 꿈꾸게 했다. 8일 여자 태권도 57㎏급의 김유진이 13번째 금메달을 안겨 지금까지 역대 최다였던 2008년 베이징, 2012년 런던 대회와 동률을 이뤘다. 남·여 근대 5종, 높이뛰기의 우상혁, 여자 역도 81㎏급, 태권도 등 남은 경기에서 선전한다면 14개 이상의 역대 최다 금메달도 기대하게 됐다. 금·은·동을 합친 전체 메달 수에서도 역대 최다(33개)를 기록했던 88년 서울 대회 능가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소수 정예가 이룬 최상의 결과다.
밤샘 응원에 나선 국민은 화려한 결과의 외양만큼이나 알찬 내용과 과정에 열광했다. 깜짝 쾌거의 원인으로 성공적인 세대교체, 그래서 올림픽 무대를 밟은 2000년대생 영 코리안들의 맹활약이 꼽힌다. 16세 10개월 18일의 나이로 여자 10m 공기소총에서 한국의 역대 하계 올림픽 100번째 금메달을 따내며 역대 최연소 메달리스트 기록도 갈아치운 반효진, 여자 10m 공기권총에서 정상에 오른 2005년생 오예진 등이 활약한 사격이 대표적이다. ‘어펜저스(어벤저스 펜싱)’로 불리며 세계적 강자로 군림해 온 펜싱 남자 사브르는 도경동(25)·박상원(24)이 ‘고참’ 김정환(41)·김준호(30)의 공백을 메우며 단체전을 3연패했다. 여자 사브르에서는 ‘맏언니’ 윤지수(31)가 국제무대 노출이 적은 후배 전은혜(27)를 준결승전에 대신 나서게 해 결국 역대 최고 성적인 단체전 은메달을 땄다.
영 코리안들은 큰 무대에서도 당찼고 쿨했다. 펜싱 사브르 결승전 중간에 선배 구본길 대신 투입된 도경동은 “질 자신이 없었다”고 했고, 올림픽 도전 ‘삼수’ 만에 꿈을 이룬 남자 양궁 단체전의 이우석(27)은 “결승전 첫 무대에 들어가는데 긴장이 안 되더라”고 했다. 남자 수영 200m 자유형에서 기대를 모았던 황선우(21)는 결선 진출에 실패하고도 “수영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다”라며 자신을 다잡았다. 방수현 이후 28년 만에 배드민턴 여자단식에서 우승한 안세영(22)이 기쁨에 취하기보다 “분노가 내 원동력이었다”며 협회에 직격탄을 날린 것도 메달 색깔에 연연하기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달라진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여자 단체전 10연패, 남자 단체전 3연패의 위업을 이룬 한국 양궁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경쟁력 저하로 몸살을 앓는 우리 사회 모든 분야가 귀감으로 삼을 만한 모범 사례다. 철저한 공정 경쟁을 통한 선수 선발 원칙, 양궁협회 회장사인 현대차그룹의 40년 후원이 빛을 발한 결과다.
양궁 3관왕 김우진은 “어린 선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메달 땄다고 젖어있지 마라. 해 뜨면 마른다”고 했다. 스포츠에는 짜릿한 승부만 있는 게 아니다. 고통 끝에 피어난 선수들의 철학도 있다. 젊은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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