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박수민 의원이 보여준 정치 토론의 품격

이정민 2024. 8. 10. 00:1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요즘같은 폭염에 국회 본회의 동영상을 들여다보는 건 고역이다. 독자들도 눈치챘겠지만,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민주당의 법안 단독 상정→국민의힘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위한 무제한 토론)→야당 단독 처리→대통령 거부권 행사→국회 재표결에서 부결→폐기…. 비정상이 상식을 대체하고 극단주의가 합리를 밀어내고 독선·독단이 이성과 토론을 가로막으면서 ‘민의의 전당’은 광기가 지배하는, 난장판 폭주 기관차가 돼버렸다.

하지만 더러운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싹 튼다. 국민의힘 박수민(초선, 서울 강남을) 의원의 필리버스터 토론이 그런 경우일 수 있겠다. 장장 15시간 50분 발언으로 필리버스터 신기록을 갈아치워서만은 아니다. 중년(1967년생)의 강철 체력이 놀라워서도 아니다. 경제 전문가로서의 식견과 소신, 조리있는 언변, 진정성 있는 태도와 품격있는 토론이었다. 이런 정치인이 더 많아진다면 수준높은 정치 토론, 국격에 걸맞는 업그레이드 정치가 가능하리라. 민주당 정책위 부의장이 방송에서 “초선의원이지만 훌륭한 내용의 토론을 보였다. 조곤조곤 설득한다면 민주당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호평한 걸 보면 나만의 ‘뇌피셜’은 아닌 모양이다.

「 15시간 50분…필리버스터 신기록
“실력·품격·진정성 느껴진 토론”
“G7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 국회
왜 미·영 국회 넘어서지 못하나”

선데이 칼럼
박 의원은 “대한민국은 반도체·K팝등 모든 분야에서 G7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왜 국회의 토론은 미국과 영국 국회를 넘어서지 못하나”라며 “진보의 문제제기에 공감한다. 하지만 보수의 걱정과 분석·대안도 받아달라. 함께 대안을 만들어내자”는 당부로 토론을 마쳤다. 박 의원의 ‘민생회복 지원금 지급법’ 반대 토론은 1일 오후 2시54분쯤 시작돼 2일 오전 6시44분 끝났다. ‘본방 사수’에 실패한 나는 하루 5시간씩 사흘에 걸쳐 ‘지각 시청’했다. 경제 관료를 지낸 박 의원은 스타트업을 창업해 큰 돈을 번 사업가 출신이다. 그렇지만 어려운 전문 용어나 수치의 나열 대신 초등학생 교재를 인용, 소득·생산·소비·세금·재정·노동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운영 원리를 쉽게 설명하며 25만원 지원의 문제점을 논리적으로 지적했다.

“소비진작 효과는 20%고 그마저도 이미 회복된 곳에 집중될 확률이 높다. 어려움에 빠진 중소상인·자영업자를 도와야 하지만, 공동체가 소중히 발전시켜온 소득 파악의 인프라와 사회안전망을 건너 뛰어 세금을 직접 살포하는 방법으론 필요한 곳에 전달될 수 없고 13조원의 국가 채무는 허공에 흩어진다. 사회복지 전달 체계 방식이 부실하다면 그걸 보강해야 한다.”

“세금으로 인위적으로 소득과 매출을 높여서 경기를 회복시키고 성장을 이어간다는 소득주도성장이란 생각의 흐름이 이 법안의 저변에 깔려있다는 걸 (민주당은) 토론하고 분석했는가.”

“대한민국은 2차대전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다. 반도체·철강·석유화학의 수출, 스타트업과 K팝의 도전,국민의 건강한 정신과 소명의식이 이뤄낸 것이다. 그 건강한 정신을 손상하는 25만원 상품권은 어떤 근거에서 할 수 있는 결정인가.”

그는 팩트와 주장을 구분해 말했다. “잘못된 팩트가 있다면 지적해달라”고 했다. 민생지원금이 인플레를 재촉발할 것이란 주장에 대해선 “부분 자극이 될 수 있어서 조심은 해야 하지만, 13조원이 전면적 물가 앙등으로 이어져 금리를 더 높여야 한다는 과장된 얘기는 하지 않겠다”며 정부와 다소 결이 다른 주장을 펴기도 했다.

툭하면 내지르는 고함과 호통,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반성 좀 하고 오라”는 식의 조롱과 비아냥, 증오와 모멸감 섞인 막말을 그의 토론에선 볼 수 없었다. 대신 겸허하고 세련된 매너를 보였다. “이런 법안이 어떻게 선거 한복판, 국회 다수당의 1호 법안으로 제출될 수 있었나. 빛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나라에서 왜 선동과 선전, 부정적 생각이 의식의 저변에 펼쳐져왔는지,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저부터 반성해본다”며 고개 숙였다. 또 “(25만원 반대로) 인기가 없어 제 정치 인생이 짧아질지 모르지만 다음 선거가 아닌,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정치가의 길을 가겠다”는 소신을 강조했다.

박 의원은 5남매를 둔 다둥이 아빠다. ‘아이들’ ‘다음 세대’란 어휘가 많이 등장한 건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으리라. 그는 가족이 언급된 대목에서 두어 차례 울먹였고 눈물을 훔쳤다. “오늘 토론의 선택지를 아이들에게 주고 싶다. 아빠는 25만원 상품권을 반대했지만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너희들의 미래를 책임진다…”며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또 “애들이 많아서 돈을 벌어야 했고, 그게 관료를 그만둔 이유”라며 “그래서 진보의 문제제기에 공감한다. 경제관료·사업자 박수민은 빨리 이걸 풀어야 한다고 질책하면 받겠다. 그러나 지금부터 풀겠다고 하면 격려를 부탁드린다”며 울먹였다.

야당을 공격하기보다 하나하나 문제점을 짚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그의 토론은, 여야 의원들 사이에서 “실력과 품격을 갖춘, 진정성이 느껴지는 토론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그의 마무리 발언도 입에서 입으로 퍼지고 있다. “한 명이 생각하면 사색이 된다. 두 명이 생각하면 대화가 된다. 모두가 생각하면 현실이 된다. 그래서 미래가 된다. 이런 표현에 어긋나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겠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