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 통해 살핀 원폭 투하와 종전
에번 토머스 지음
조행복 옮김
까치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 두 도시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대부분 민간인인 15만~24만6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곳에는 조선인도 약 10% 살고 있었다. 그 일주일 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원폭 투하에 대해 미국은 일본의 조기 항복을 받아내 전쟁을 일찍 끝내고 희생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함대는 격침되고 도시는 폭격으로 불타며 사람들은 굶주리는 당시 상황에서 일본은 가만히 놔뒀어도 항복했을 것이라는 목소리도 높다. 원폭을 굳이 써야 했는지, 두 발이나 투하할 필요까지 있었는지 등 원폭 회의론의 근거다. 냉전을 앞두고 미국이 소련을 압박하고 경고하려는 목적에서 원폭을 투하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미국 뉴스위크·타임 기자 출신인 지은이는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이러한 가설에 반박한다. 지은이는 당시 종전을 이끈 세 사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역사상 가장 거칠고 폭력적이라는 전쟁 종식 과정을 기록한다. 그는 당시 연합군이 일본 본토 상륙 작전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려면 쌍방 합쳐 수백만 명이 추가로 희생됐어야 했기에 핵폭탄으로라도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켜야 했다는 주장을 편다.
미국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은 원폭 투하 과정에서 윤리와 국익 사이에서 번민했다. 핵폭탄 투여 뒤의 사진을 보고 가벼운 심장마비를 겪었다. 태평양 전략폭격 사령부 수장인 칼 스파츠 장군은 ‘목적은 정당하지만 수단은 잔혹한’ 원폭 투하를 임무의 하나로 담담하게 받아들였지만 여생을 양심의 가책 속에 보냈다.
500만 명의 병력과 죽창부대를 믿어서였는지 1945년 8월 9일 열린 일본의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선 항복과 전쟁지속 의견이 3대 3으로 팽팽했다. 당시 일본 군사참의원으로 이 회의에 참석한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외상은 ‘전쟁을 2~3년 더 끌고 갈 수 있다’는 내각총리 스즈키 간타로 제독에 맞섰다. 주독일·주소련 대사와 두 차례 외무장관을 지낸 도고는 항복하지 않으면 더 큰 비극이 온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목숨을 건 설득에 나섰다. 종전 뒤 전범으로 수감돼 감옥에서 숨졌다. 도고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손으로 어려서 이름은 박무덕이었다.
원폭 투하와 8월 15일 항복 사이는 역사상 가장 긴 일주일이었고, 어쩌면 가장 많은 목숨을 구한 시간이었다. 세 사람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이유다. 원제 Road to Surrender: Three Men and the Countdown to the End of World WarⅡ.
채인택 전 중앙일보 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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