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장기판 같은 삶

2024. 8. 10.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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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판, 전남 담양, 1975년 ⓒ 김녕만
아무리 농사일이 바빠도 짬은 있다. 벼는 뙤약볕에 튼실하게 익어가고, 봄에 심은 작물을 거둬들인 밭은 김장배추와 무를 심기 전 잠시 쉬고 있다. 입추를 지나 말복에 이르는 가장 더운 한 주 동안에는 농사일에 백전노장 할아버지들도 시원한 느티나무 아래에서 느긋하게 장기와 바둑으로 소일삼는다. 지금 같으면 마을회관에 모일 테지만 그때만 해도 바람이 지나는 길목 나무 그늘은 한여름 최고 명당이었다.

“여기 장기 두던 사람 어디 마실 갔는가?” 외통수에 몰려 쩔쩔매는 상대방을 약 올리는 심리전도 필수다. 으레 참전한 선수보다 훈수 두는 사람에게 수가 더 잘 보이는 법. 기가 막힌 수가 있는데 그걸 못 보고 있으니 답답하다. 그러나 막걸리 내기에 잘못 끼어들었다가 막걸리 한 잔 공짜로 얻어먹기는커녕 욕만 먹을 수 있어 입술만 달싹거리며 애써 참는다. 극성스럽게 울던 매미도 잠시 주춤한 사이 “장군!” “멍군!”을 번갈아 외치는 소리가 호기롭게 마을을 울린다.

그때는 미처 몰랐는데 지금 다시 보니 할아버지들의 옷차림이 단정하기 이를 데 없다. 무더위에도 하얀 모시옷과 중절모에 양말까지 멀리 외출이라도 나가는 사람처럼 일습을 갖췄다. 모시옷이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지 않도록 팔과 목덜미에 등거리를 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일전을 벌이고 있다.

인생은 장기판 같다. 너무 바싹 다가앉은 당사자보다 거리를 두고 물러앉은 사람의 눈에 묘수가 보이고, 작은 걸 잡으려고 욕심부리다 큰 걸 잃거나 소심하게 방어에만 몰두하다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패할 수 있다. 때로는 아까운 차(車)나 포(包)를 과감하게 희생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하는데, 무엇보다도 오늘 졌다고 해서 내일 또 지라는 법은 없다. 백전노장은 그걸 안다. 엎치락뒤치락 이기고 지는 한나절 장기판처럼 한평생 삶 역시 한판으로 끝나는 승부가 아니라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지치지 않고 계속 살아내야 하는 것임을.

사진가 김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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