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승련]2024년 수미 테리, 2002년 정태인

김승련 논설위원 2024. 8. 9.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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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 테리(김수미·52)가 체포됐다가 풀려났지만, 간첩죄를 저질렀다고 단언하기는 이르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그는 미 중앙정보국(CIA)을 떠난 뒤 우리 국정원에 협력했다.

미 의회는 그를 청문회에 초청했을까.

그는 어길 법 규정이 없었던 탓에 수미 테리처럼 법 위반은 안 했지만, 캠프 참여 사실을 감췄다는 점에서 수미 테리와 다를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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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련 논설위원

수미 테리(김수미·52)가 체포됐다가 풀려났지만, 간첩죄를 저질렀다고 단언하기는 이르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그는 미 중앙정보국(CIA)을 떠난 뒤 우리 국정원에 협력했다. 간첩행위를 했다고 보기엔 명품백을 선물 받은 뒤 매장의 자기 계정에 등록하는 등 어수룩한 일이 너무 많았다. 그는 “외국 정부 에이전트로 활동해도 좋지만, 법무부에 등록한 뒤 활동 내용을 신고하라”는 법 조항을 안 지킨 쪽에 가까워 보인다.

실체 감추면서 ‘객관적 지위’는 누려

그는 지난해 3월 워싱턴포스트에 윤석열 대통령이 왜 일본에 양보의 손을 내밀었는지를 다룬 칼럼을 썼다. 윤-기시다 정상회담 직전 시점으로, 국정원이 준 자료를 바탕으로 썼다는 게 공소장에 담겼다. 그가 법을 지켰더라면 법무부에 “어디 어디에 한미일을 주제로 칼럼을 썼다”는 정도를 보고하면 됐을 일이다. 다들 그렇게 한다. 20년 전 특파원 시절 미 법무부의 사무실 한쪽에서 일반인에게 공개된 ‘에이전트 보고자료’라는 걸 뒤져 봤는데, 아주 개략적인 내용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수미 테리가 합법적 에이전트로 등록했다고 가정해 보자. 신문은 그 칼럼을 실어줬을까. 미 의회는 그를 청문회에 초청했을까. 그는 한국에서 돈과 선물을 받은 자기 정체성을 감춤으로써 전직 CIA 북한 분석관이라는 객관적 전문가로 행세했다. 그 덕에 유력 매체에 글을 척척 싣고, 미 의회에서 존재감을 유지했다. 정직의 의무를 저버렸기에 가능했는데, 미 검찰의 기소는 이 점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03년 노무현 인수위 때 정태인 씨(2022년 작고)가 경제1분과 인수위원이라는 핵심 자리에 발탁됐다. 유시민 씨와 대학 동기로, 노무현 대통령이 말을 편하게 놓을 정도로 가까운 참모로 통했던 인물이다. 그때 “정태인은 대선 1년 전부터 캠프에서 노무현 후보의 경제 과외교사로 일했다”는 기사가 여럿 등장했다.

문제는 정태인이 2002년 1년 내내 공영방송 KBS에서 퇴근길 라디오 경제 시사 프로를 진행했다는 데 있다. 경제전문가라면서 발탁된 자리였다. 그는 어길 법 규정이 없었던 탓에 수미 테리처럼 법 위반은 안 했지만, 캠프 참여 사실을 감췄다는 점에서 수미 테리와 다를 게 없었다. 그는 진보적 톤으로 방송했는데, 수백만 KBS 청취자를 상대로 간접 선거운동을 한 것은 아닌가. 하지만 당시 분위기에서 누구도 이해충돌을 지적하지 않았다. 이런 식의 반칙 사례가 정태인뿐일까. 수많은 대선 때마다 ‘비공개로 뛴 대선 캠프 참여자’가 교수, 변호사 등 전문가의 직함을 앞세워 방송에 출연하고 신문에 글을 쓰는 일이 적잖게 있었을 거라고 본다. 이들은 미디어의 신뢰를 훼손시킨 대가로 캠프로부터 ‘열심히 뛴다’는 평가를 챙겼을 것이다.

“캠프 참여 중” 밝히는 게 어렵나

미국 매체에선 부조리 차단의 흔적이 종종 발견된다. 2007년 워싱턴포스트의 한 칼럼엔 이런 글이 붙었다. “이 글을 쓴 (네오콘 이론가) 로버트 케이건은 공화당 대선 후보 매케인을 비공식적으로, 무급 형태로 돕고 있다.” 두 달 뒤 오바마 캠프 인사의 글에도 비슷한 ‘편집자의 메모’가 달려 있었다. 좋은 글은 얼마든지 게재하되, 독자들이 그 글의 필자가 특정 후보의 조력자라는 걸 알고는 읽으시라는 뜻이다. 독자 친화적이고, 언론의 자부심을 지키려는 조치다.

전문가 그룹의 자존감은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종종 실수하지만, 바로잡으려 노력할 때 사회는 단단해진다. 우리 수준으로 볼 때 2007년 미국 신문의 노력을 기본으로 만드는 게 대단한 일 같지 않다. 캠프 참여 인사들이 “나는 캠프에서 활동 중”이라고 밝히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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