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건축가 김원의 세상 이야기 ⑦... 어원으로 본 독도

성도현2 2024. 8. 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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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 등 설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김원 건축가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제공

독도는 어원으로 봐도 우리 땅이라는 주장에 동참하고 싶다. 독도라는 이름의 유래를 말의 관점에서 접근해 보는 것은 다른 어떤 역사적 증거물보다 확실할 수 있다.

독도라는 이름은 본래 이 섬의 이름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조선 성종 때는 삼봉도(三峰島)라 했고, 정조 때는 가지도(可支島)라고 했다. 19세기 말 이후에는 석도(石島) 또는 독도(獨島)라고 불렸다.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독섬'이라고 한다는데, 그것은 석도(石島, 돌섬)라는 뜻이라고 한다. 조선 말기에 울릉도를 개발하는 사업이 진행되면서 전라도 사람들을 많이 이주시켰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라도 사투리의 '독'이 '돌'(石)의 의미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경상ㆍ전라지방에서 '돌'을 '독'이라고 하며, 제주지방에서 병아리('닥새끼'로 칭함)를 '독새끼'라고 하듯이 '독'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닥'이 됐다가, 받침을 발음 못하는 일본인들이 다시 '독 - 도꾸 - 더깨 - 다께'로 바꾸어 불렀으며, '섬'이 '서미 - 시미 - 시마'로 변했다는 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곰'(熊)을 일본인들이 '고마(쿠마)'라고 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1900년에 대한제국 황제 칙령으로 독도를 울릉군에 편입시킬 때 서류상으로 '석'(石島, 돌섬)라고 적고 있음을 봤다.

그래서 '다께시마'는 '돌섬'이라는 뜻의 일본식 한국말이라 할 수 있다. '돌섬'이라는 뜻으로 '다께시마'란 말은 독도를 가장 잘 묘사하고 있지만, 일본말 '다케시마'(竹島)가 독도를 묘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것은 정말 '돌섬'이지 '대나무 섬'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평소 왜 일본인이 거기다 대나무(竹 ; 다케)를 갖다 붙였을까 궁금했다. '다케'가 우리말 '독'의 와음(訛音)이라는 설에 무릎을 쳤다.

다른 한 가지 독도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는 야생식물학자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예컨대 백두대간에서 자라는 '날개하늘나리'라는 나리꽃이 독도에 피는데 그것은 일본에는 없는 종류라는 것이다. '섬괴불나무'는 1900년대 초에 우리나라 식물을 조사해 계통을 세우고 1천여 종의 이름을 붙인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1882~1952)에 의하면 한국의 울릉도에서만 자라는 '한국특산관목'이라는 것이고, 울릉도 해안에 자라는 십자화과의 '섬장대'와 '토종민들레'도 독도에서 자란다고 한다.

야생화를 비롯한 식생분포를 연구, 분석해 보면 이곳이 우리 땅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다. 식물들은 씨앗과 포자상태로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자신이 생장하기 적당한 땅에 내려앉아 정착을 하기 때문이다.

경북대 하지홍 교수가 독도에 삽살개를 데려가 지신(地神)밟기를 한다는 이야기도 재미있고 그럴듯했다. 삽살개는 털이 길어서 이마의 털이 눈을 덮어 자란다. 삽살개는 습관이 돼 눈을 내리덮은 털 사이로 밖을 내다보는 것이 이력이 나고 불편하지도 않은 모양이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아주 답답해 보인다. 어떨 땐 털에 가려 눈이 안보여서 귀신같이 허연 윤곽선만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래서 삽살개가 액운을 쫓아내는 영험함이 있다고 믿는 것 아닌가 한다.

우리 집에 있던 삽살개도 하 교수가 번식시켜 분양해 준 순종 암놈인데, 이름은 '앵두'라고 예쁘게 지어줬지만, 어떤 때 밤에 비라도 오는 날이면 정말로 귀신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여서 깜짝 놀라곤 했다. 제발 하 교수의 삽살개들이 독도의 지신들을 영험하게 밟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본인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며 저들의 아키다견(秋田犬)과 닮은 진돗개를 띄우는 대신, 우리의 대표견인 삽살개를 원천적으로 몰살하려 했던 쓰라린 역사를 이겨내고 다시 살아난 삽살개라서 녀석들의 지신밟기는 더욱 뜻깊은 일이었다.

또 하나, 지질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독도 주변 바다 밑 200~300 미터 깊이에는 세 개의 해산(海山, 바닷속의 산)이 있는데 그중 하나의 산에서 화산이 터져 올라온 것이 독도라는 것이다. 그 세개 산이 울릉도를 포함하는 울릉분지를 만들고 있다는데 우리가 늘 이야기하던 대로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는 지리학적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증거가 될 만한 전적, 지도 등 서류들이 많이 발견됐지만, 특이한 것 하나를 소개한다. 18-19세기 중국에서 활동하던 가톨릭 선교사 대부분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알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지도가 또 하나 있다.

예수회의 뒤 알데(Jean Baptiste Du Alde, 1674-1743) 신부가 1735년에 펴낸 '중국통사'라는 책에 프랑스의 지도학자 당빌(D'Anville)이 그해에 그린 '조선왕국전도'가 있는데 이 지도에는 독도는 물론이고 간도까지 조선의 영토로 그려져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도 136년 전에 그려진 조선전도는 서양인이 그린 최초의 한국 전체 지도로서 당시 중국에 와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과 청나라 각지를 답사하고 측량해 그린 것이다.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서양 선교사들의 이같은 인식은 이후 교회지도 제작에 그대로 이어져,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도 1846년에 외국 선교사들을 위해 조선전도를 직접 만들면서 울릉도 동쪽에 독도를 그리고 '于山'이라고 표기했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4월 7일자로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친필 서한에서 그해 조선전도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당시 부제였던 김 신부는 몰래 귀국해 선교사의 안전한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이 지도를 제작했다. 김대건 신부는 지도에 불필요한 산이나 강 이름 등을 빼고 전국의 주요 관부와 병영 266곳, 만주 봉황성에서 의주까지 들어오는 도로, 남해안 해로 등을 수록했다.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는 우리나라 지명을 발음 그대로 로마자로 표기한 최초의 지도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 이전에 서양에 알려진 우리나라 지도는 프랑스 왕실지리학자 당빌이 제작한 '조선국도'와 독일인 시볼트가 제작한 '조선반도도'가 전부였다. 당빌의 조선국도는 북경 주재 프랑스 예수회원들이 10여 년간 수집한 중국과 조선측의 자료를 근거로 제작해 조선 지명이 모두 중국 발음으로 표기돼 있다.

시볼트의 조선반도는 일본원도에 의거해 그린 지도였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는 서양에 우리 지명을 소개한 첫 지도다.

1855년 프랑스에서 간행된 지리학사전에는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에 대해 "김대건은 분명히 당빌과 시볼트가 사용한 것과는 다른 지도나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 그의 지도를 작성했다. 과학적 여건이 명백히 결여돼 있음에도 거기에는 우리가 항상 참고해야 할 많은 정보가 있다. 그것은 예수회 수사들이 천문학적 원리에 의해 수정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중국인들이 작성한 지방지도와 상이한 것이다. 달레가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한 지도는 김대건의 지도와 결부시켜야 할 것이다"고 평가했다.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는 중국 변문에서 최양업 신부(당시 부제)와 함께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매스트르 신부에게 전달되었고, 매스트르 신부는 중국 상하이에서 자신들을 도와주던 프랑스 총영사 몽티니에게 이 지도를 건넸다. 몽티니는 프랑스로 귀국해 이 지도를 왕립도서관에 기증했고 오늘날까지 파리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는 자신의 조선전도에 대부분의 산과 강 이름을 삭제했음에도 울릉도와 독도를 기재해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전도에 울릉도 동쪽에 독도를 그리고 로마자로 'Ousan'이라고 뚜렷하게 표기했다.

독도는 조선 후기인 1881년(고종 18년)부터 '독도'로 불렸으며 이전에는 삼봉도(三峰島)ㆍ우산도(于山島)ㆍ가지도(可支島) 등으로 불렸다.

리델 주교는 1869년 '한중일 지도'를 제작하면서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참고해 독도를 명기했고, 달레 신부 역시 1874년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보완해 제작한 자신의 '조선지도'에 독도를 조선 땅으로 표기했다.

'일본은 에도 막부 초기인 17세기 중엽에 다케시마 영유권을 확립했다'고 일본 외무성이 주장했으나, 에도 막부는 오히려 1696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확인해 일본 어부들의 출어를 금지했다고 나이토 세이추 시마네현립 대 명예교수는 반박했다.

또 메이지 정부의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이 독도와 울릉도가 일본 영토인지 조사한 뒤, 1877년 3월 '독도와 울릉도는 일본 영토와 관계없으니 조심하라'고 내무성과 시마네현에 지시한 공문서인 태정관 지령문을 근거로 일본 주장을 부인했다.

그는 1905년 일본 정부의 독도 편입 및 영유 의사 재확인 주장도 고유 영토론과 모순되는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는 "1904년 9월 시마네현 니카이 요자부로가 강치잡이를 위해 내무· 외무·농상무 대신에게 리앙코섬(독도)의 영토 편입 및 10년간 임대를 청원했다"는 내용을 적시하며 독도 영유의사 재확인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나이토 교수는 "당시 야마자 엔지로 외무성 정무국장, 마키 보쿠신 농상무성 수산국장, 기모쓰게 가네유키 해군성 수로부장 등 세 명이 중심이 돼 강치잡이를 하기 위해 조선 쪽에 대하원(독도 이용청원)을 하려던 니카이를 유인해서 그의 대하원 신청을 독도 '영토 편입 및 대하원'으로 바꿔 일본 정부에 내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러-일 전쟁으로 동해를 지나는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는 망루를 설치하기 위해 독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가 '공작'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들 3명 중 마키와 야마자는 각각 '한해통어지침'(韓海通漁指針ㆍ1903년), '최신한국실업지침'(最新韓國實業指針ㆍ1904년)이라는 일본인을 위한 한국 가이드북의 서문을 썼다. 그 가운데 '조선 강원도에 속하는 울릉도와 그 부속 리앙쿠르(독도)'라는 서술이 나온다고 나이토 교수는 지적했다.

1900년 대한제국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위해 칙령 41호에서 제기한 석도(石島)가 독도임을 지칭하는 1905년 이전 기록을 찾아내는 게 관건이라는 것이다. 한국 학자들은 석도가 한국 방언으로 돌(石)을 '독'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이를 발음대로 한자로 고치면 독도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부인하고 있다.

*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성도현 기자>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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