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생각하는 한국 정원도시의 갈 길[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연설대에 오른 그의 첫 마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세계적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미래를 창조하는 여건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지도자가 할 일입니다.”
그는 싱가포르국립대 건축학과 교수이자 싱가포르 정원 정책을 이끄는 탄 푸에이 옥 싱가포르 식물원장입니다. 그는 7일 싱가포르 선텍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8회 세계식물원총회에서 ‘싱가포르 식물원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싱가포르가 어떻게 녹색 도시국가를 만들어왔는지 과거를 통해 배우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행운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라 명확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다”며 “생명 다양성 보존도 우리가 뭘 지켜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가 강조하는 건 과학과 교육입니다. “1859년 문을 연 싱가포르 식물원은 초창기에는 과학적 접근이 부족해 크고 작은 실패를 겪었지만,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나무와 토양을 관리하면서 세계적 식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미래세대를 위한 식물원 교육은 특히 중요합니다. 우리 삶 속에 자연이 스며들어야 행복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로 향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자신의 강연 제목에서 ‘싱가포르’라는 단어를 지운 슬라이드를 띄웠습니다. 그리고 나니 ‘식물원의 미래’라는 문구가 됐습니다. 그의 결론은 첫 마디만큼이나 메시지가 강렬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자. 아울러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세계적으로 행동하자(Think Global, Act Local & Think Local, Act Global).”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김선미의 시크릿가든>은 싱가포르에서 전합니다. 저는 싱가포르 선텍 컨벤션센터에서 6일부터 10일까지 열리는 세계식물원총회에 참석하고 있어요. 이곳에서는 11일까지 싱가포르 가든 페스티벌도 열리고 있습니다.
세계식물원총회(GBGC·Global Botanic Gardens Congress)는 전 세계 식물원 관계자들이 모여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올해로 8회째인 이번 총회에는 73개국 200여 개 식물원에서 99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기후위기에서 어떻게 생물 다양성을 지켜낼 것인지, 각국에서 어떤 시도로 식물원을 운영하는지 각 컨퍼런스룸을 찾아다니며 강연을 듣고 서로 교류하는 행사이지요. 동남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린 올해 총회는 세계식물원보존연맹(BGCI·Botanic Gardens Conservation International)과 국립공원위원회 산하 싱가포르 식물원이 이끌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도심을 걷다 보면 왜 이곳이 ‘정원도시’인지 온몸으로 느껴집니다. 수직녹화를 통해 초록의 식물로 뒤덮인 건물들, 상류층이든 중산층이든 거의 누구든 갖추고 있는 발코니 정원, 카페를 싱그런 감성으로 채워주는 컨테이너 정원, 숲길처럼 자연스럽게 가로수를 조성한 공개 공지, 자연 치유력을 높여주는 시니어 타운, 무엇보다 어디에서든 접근 가능한 400여 개의 공원과 정원들, 그리고 그 도심 속 자연 쉼터를 잇는 길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꿈을 심어라, 잡초를 뽑아라, 그리고 행복한 삶을 키워라(Plant deams, pull weeds and grow a happy life).’
싱가포르는 정부의 강력한 주도로 녹색 도시국가를 만들어왔습니다. 한국의 부산 정도인 735㎢ 면적에 인구 592만 명인 싱가포르에는 무려 600만 그루의 나무(이 중 200만 그루가 도심 속 나무)가 심어있습니다. 초대 총리인 리콴유(李光耀·1923~2015)가 1963년 전국적 나무 심기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정원도시’(Garden City) 정책을 펼쳐왔기 때문인데요. 도시화를 거치면서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국토가 좁은 한계를 정원 정책으로 타계해 온 것입니다.
싱가포르 정부는 50년 간 써 온 ‘정원도시’ 대신 2012년부터 ‘정원 속의 도시(City in Garden)’라는 슬로건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에는 다시 ‘자연 속의 도시(City in Nature)’로 바꿨습니다. 왜일까요. 싱가포르 국립공원위원회의 황유닝 최고책임자가 6일 ‘자연 속의 도시로 전환되는 싱가포르’라는 제목으로 펼친 이번 총회의 개막 연설 속에 답이 있습니다.
“2012년 싱가포르 정부는 대규모 도심 정원인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를 열면서 ‘정원 속의 도시’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기존의 ‘정원도시’와 단어는 비슷해도 뚜렷하게 다른 목표가 있었습니다. 공원과 정원의 녹지를 통해 공동체를 공간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기후, 생태, 사회적 회복력이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슬로건인 ‘자연 속의 도시’는 이 절박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방향입니다.”
싱가포르 ‘자연 속의 도시’는 5개의 전략을 내세웁니다. 자연의 보전과 확장, 정원과 공원을 더 자연답게 만들기, 도시 경관 속으로 자연 복원, 녹지 공간 간의 연계성 강화, 동물 관리 강화입니다. 예를 들면, 더 많은 가로수와 빌딩 녹화를 통해 무더위를 식히고 공기의 질을 높이겠다고 합니다. 생물 다양성을 갖춘 미래를 위해 멸종위기 식물 종자를 보존하고 새와 나비를 관찰하는 ‘시민 과학자’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합니다. 2030년까지 모든 가정에서 10분 이내의 도보 거리에 공원이 있게 하겠다고 합니다.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나무와 숲을 관리하겠다고 합니다.
그의 설명에서도 과학과 교육이 ‘자연 속의 도시’를 구현시키는 두 개의 큰 기둥이었습니다. 미국의 한 식물원장에게 싱가포르의 정원 슬로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습니다. “대단히 영리한 마케팅처럼 들리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도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한편 올해 세계식물원 총회는 내년 세계식물원교육총회(세계식물원 교육에 초점을 둔 총회) 개최를 앞둔 한국 산림청 국립수목원이 ‘플래티늄 후원사’로 참여해 한국의 식물 위상을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수원의 해오라비난초와 경남 진주의 진주바위솔 등 지역 자생식물을 보존하는 사례 발표도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도 백두대간 수목원의 종자 보전, 반려식물 키트, 아라홍련 전시 등을 소개했습니다.
특히 국립수목원은 이번에 플래티늄 후원사 자격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싱가포르 국립수목원에 벤치를 기증했습니다. 연간 450만 명이 방문하는 82ha 면적의 싱가포르 식물원에는 지금껏 단 8개의 개인 추모용 기증 벤치가 있었는데 기관이 벤치를 기증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싱가포르 식물원에 들러 이 벤치에 앉아보니 식물 분야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외교의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싱가포르 식물원에 방문하신다면 헬리코니아 워크(Heliconia walk)에 놓인 이 벤치에 꼭 앉아보세요.
이번 총회 기간 틈틈이 싱가포르를 다닐 때 도심 정글을 즐겁게 탐험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한국의 정원도시 열풍이 머릿속에서 내내 맴돌았습니다. 너도나도 국가정원을 만들겠다는 우리 지방자치단체들은 과거를 통해 배우며 미래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다음 세대가 다양한 생물체와 함께 살 수 있는 자연환경을 생각하며 정원을 만들고 있습니까. 자원봉사자와 시민정원사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있습니까. 큰 방향과 전략 없이 그저 예쁜 꽃만 잔뜩 심으면 정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까. 한국에서 정원은 즐거움의 공간이 아니라 혹시 숙제의 공간이 된 건 아닙니까.
싱가포르=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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