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꽃과 꿈이 피어날 때, 안동
(시사저널=글 김수아·사진 신규철)
강렬한 햇살 아래 나뭇잎이 무성하다. 모든 것의 존재감이 뚜렷해지는 계절, 경북 안동을 거니는 동안 마음도 활짝 피어났다.
한 마을에 낯선 손님이 들어선다. 고택과 벽화, 낡은 건물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는 모습에 이들이 방문객임을 짐작한다. 이곳은 안동 임하면에 위치한 금소마을로, 동네를 여행하는 '금양연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푸른빛 가득한 풍경을 눈에 담고, 건강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근사한 휴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
마을 한편에 자리한 농협 창고가 오리엔테이션 장소라니,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대문 고리만 보수했을 뿐 내부는 그대로 두었다. 금양연화 프로그램을 기획한 김관수 작가와 함께 마을 곳곳을 누비며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만세공원 앞에 위치한 봇도랑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금소'라는 이름에 관한 단서가 눈앞에 있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물길이 비단을 펼친 것처럼 아름다워 '금수'라고 불렀어요. 이후 '금소'가 되었죠. 양지바른 땅이라는 의미로 '금양'이라 부르기도 했어요." 그는 옛 이름 중 하나인 '금양'과 영화 에서 모티프를 얻어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금소마을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남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한적한 동네에서 여유를 즐기는 게 금양연화의 전부가 아니다. 마을 자원을 활용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의미 있고 알찬 일정을 꾸민다. 첫날 저녁에는 방앗간으로 쓰던 공간에서 쿠킹 클래스를 진행한다. 메뉴는 달마다 달라진다. 6월에는 안동 대표 음식인 안동찜닭을, 7월에는 마을에서 재배하는 헴프시드를 넣은 파스타로 한 끼를 건강하고 든든하게 채웠다. 필요하면 텃밭에 나가 채소를 수확해 오기도 한다. 이렇게 자급자족을 몸소 실천하는 동안 마을과 한결 가까워진 기분이 들 테다.
안동의 좋은 물, 누룩, 고두밥을 활용해 전통 막걸리를 만들고 시음하는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114년 전통 임하양조장 3대 대표와 함께한다. 임씨 종택 마당에서 구수한 향을 맡는 것만으로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오는 듯하다. 이어지는 김 작가의 설명에 귀가 솔깃하다. "프로그램이 다 끝나면 주막으로 운영해요. 제철 재료를 활용한 전, 안동 콩으로 만든 두부김치를 안주로 판매하고요." 어둠이 찾아오자 금소마을에서 저무는 하루가 아쉬운 사람들이 탁상에 둘러앉아 끝을 유예한다. 대화에 공백이 생겨도 개구리 울음소리와 잔 부딪는 소리, 호탕한 웃음소리가 그 자리를 비집고 차지하니 부담 없이 머무르겠다.
수백 번 스친 손길로 탄생하는 안동포의 가치
이번에는 안동포짜기마을보존회로 걸음을 옮긴다. 단순히 안동포를 짜는 과정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예기치 못한 즐거움이 기다린다. 수없이 대마를 만지고 바라봤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이렇게 마음을 파고들 줄이야. 금세 정이 들어 할머니를 부둥켜안고 울던 손님이 있었다는데, 그 심정을 알 것 같다. 이날은 조경숙·박순자 전승교육사를 만났다. 두 분 모두 20대 초반에 이 마을에 와서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안동포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안동포는 안동에서 생산하는 삼베를 가리킨다. 삼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토양, 뛰어난 인력을 갖춘 안동은 오래전부터 안동포의 우수한 품질을 널리 인정받았다. 수확한 대마는 증기에 찌고 말려 껍질을 벗긴다. 그런 다음 다시 겉껍질을 훑는데, 안동포 길쌈에만 있는 독특한 공정이다. 말의 유래도 하나 배운다. 삼 삼는 과정에서 치아로 실의 올을 쪼개다 보면 이가 움푹 파이기 마련이고, 여기서 '이골이 나다'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허벅지에 놓고 삼을 하나로 길게 연결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야 하므로 허벅지에 멍이 가실 날이 없다. "지금이야 전문 교육과정이 있지만, 옛날에는 눈치로 배워야 해서 훨씬 오래 걸렸어요." 조경숙 선생이 베틀에 앉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을 감내했을지 헤아릴 수가 없다.
1810년, 금수서당으로 처음 지은 금곡재는 현재 전시장 역할을 한다. "금곡재는 방문객에게 사랑받는 장소 중 하나예요."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에 오르는 순간, 그 말을 바로 이해했다. 한 걸음 옮겼다고 이토록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다니. 안동포로 지은 옷을 입으신 두 할머니의 온화한 표정이 더해져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동포의 예술성과 가치에 주목하거나 지역 문화를 소재로 한 예술 작품이 금곡재를 계속 꾸밀 예정이다. 다음, 그다음에는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기대감이 차오른다.
마지막으로 계와고택에서 차 거름망을 만들며 안동포의 촉감을 다시 한번 손에 새겼다. 찻잎을 걸러 주는 작은 천 조각 하나에도 수없이 많은 손길이 오갔다 생각하니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안동포가 이름을 드높이던 찬란한 시절을 기억하는 할머니들이 여전히 금소마을에 산다. 김관수 작가는 이들에게도 예전 마을을 떠올리게 하고 싶었다고 털어 놓는다. 한 사람의 꿈에서 시작된 여행 프로그램이 마을의 문을 활짝 열어 방문객을 너그러이 환대한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따스함에 마음을 연 여행자는 마을 주민의 삶과 꿈을 진심으로 경청한다. 떠나는 이와 남는 이 모두 마을에 웃음이 오래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꿈을 품는다.
누구나 꿈꿀 수 있다
다음 목적지는 꿈을 키우고 보존하는 또 다른 공간, 송강미술관이다. 폐교된 송강초등학교가 솔밤작가촌을 거쳐 2023년 6월에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입구 로비 천장에 매달린 '삼족오'가 시선을 끈다. 안동대학교 출신 조각가 정의지가 버려진 양은 냄비를 자르고 두드린 뒤 이어 붙여 만들었다. 폐교가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듯 이 세상 모든 것에 저마다 쓰임이 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곳은 취향에 따라 시간을 보내기 좋다. 미술 작품을 감상하려는 사람은 전시관에서, 희귀 단행본과 문학작품을 읽고 싶은 애서가라면 안동문학관에서, 한국의 다과 전통이 궁금한 이는 떡살전시관에서 발견하고 배우는 기쁨을 누린다. 미술관 옆 카페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어도 괜찮다.
송강초등학교 시절 아이들을 굽어보던 나무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운동장을 뛰다가 넘어졌지만 벌떡 일어나 걸어가던 아이, 멍하니 구름의 움직임을 살피던 아이를 모두 지켜봤을 나무는 이제 미술관을 찾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김명자 관장은 누구나 꿈꿀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기 위해 이 공간을 마련했다 말한다. 학교에서 미술관으로 기능은 달라졌지만 공간의 목적은 동일해 보인다. 이곳에서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좋다.
안동에서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장소를 차례로 찾았다. 누가 이 땅을 밟았을지, 어떤 몸짓과 표정을 지었을지 호기심이 인다. "한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면 장소들이 남는다./ 잘 자라다 가요." 봉주연 시인의 시 '주소력'을 자꾸만 곱씹게 된다. 앞으로 이곳에 들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 "잘 자라다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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