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 신변 보호·왕궁 호위… 천민·외국인도 무예 탁월하면 선발[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내금위·겸사복·우림위 세조직
내금위는 양반자제로만 구성
군인 모두 종9품~정3품 품계
7년 복무 마친 뒤 연장도 가능
출신 군관 우대 좋고 출세 빨라
영·정조 지나며 명칭 등 변화
1894년 갑오개혁때 완전 폐지
#내금위·겸사복·우림위로 이뤄진 왕의 군대
금군청은 왕의 친위부대인 금군(禁軍)을 일컫는다. 금군은 조선 중기까지는 그저 금군으로 불리며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등 3위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각 3명의 장수가 통솔하는 구조였다. 그러다 효종 대에 이르러 내삼청으로 통합 일원화하고 하나의 정식 군영으로 발족했고, 이후 현종 7년(1666년)에 금군청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소속 병력도 700명으로 규정했다.
금군의 주요 직책은 종2품의 별장을 위시하여 그 아래 정3품의 장수 7명이 포진한 형태였다. 7명의 장수에는 겸사복장 2명, 내금위장 3명, 우림위장 2명이 있었다. 이들 7명의 장수는 7번으로 나누어진 금군의 번장들인 셈이다. 금군은 총 700명으로 내금위가 300명, 겸사복이 200명, 우림위가 200명이다. 따라서 내금위는 3명의 내금위장이 각 100명씩 통솔하고, 겸사복은 2명의 겸사복장이 각각 100명씩 통솔하고, 우림위는 우림위장 2명이 각각 100명씩 통솔하는 구조였다.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등 세 조직은 성립 과정과 출신 성분이 달랐다. 우선 내금위부터 살펴보면, 내금위의 전신은 내상직이었는데, 태종 7년(1407년)에 내금위로 명칭을 변경했다. 그리고 1409년에는 내시위라는 별도의 금군을 만들었는데, 세종 6년(1424년)에 내시위는 내금위에 합쳐졌다. 내금위 병력은 양반 자제들 중 무예가 탁월한 자들만 선발됐다. 병력 수는 성종 대까지 60명에서 200명 사이에서 변동이 심했는데, ‘경국대전’에는 190명으로 규정됐다. 그러다 연산군에 이르러 대폭 증가하여 500명이나 되었다가 점차 줄어 400명이 되었다가 숙종 대에 300명으로 확정됐다. 하지만 규정상으로만 300명이었을 뿐 400명 가까이 유지된 경우가 많았다.
내금위와 함께 금군청을 이루는 또 하나의 부대인 겸사복은 고려시대의 내사복시제도에서 비롯된 부대다. 태종 9년(1409년)에 창설돼 국왕 신변 보호와 왕궁 호위 등을 담당했다. 겸사복은 내금위와 달리 반드시 양반 신분일 필요는 없었다. 신분보다는 무예 능력을 더 중시하는 부대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겸사복에 속한 병력은 양반, 서얼, 양민이 뒤섞여 있었으며, 심지어는 천민이나 외국인도 무예만 탁월하면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특히 겸사복에는 북계 인력이 많았는데, 이들 북계인은 2년씩 번갈아 변방과 궁궐에서 근무했다.
금군청에 속한 또 하나의 부대인 우림위는 신분상으로 서얼로 이뤄진 병력이었다. 이들은 주로 겸사복과 내금위가 변방으로 파견될 때 금군 부족 문제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부대였다. 물론 이들도 무예가 뛰어나고 신체가 우수해야만 발탁될 수 있었다.
이렇게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로 이뤄진 금군청 병사들은 모두 품계를 받은 군인들로 이뤄져 있었다. 이들의 품계는 종9품에서 정3품까지 주어졌으며, 모두 기간제인 체아직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의 복무 연한은 7년이었으나 신분이나 품계에 따라 기간을 연장하기도 했다. 또 7년의 복무 기간이 끝나면 대개 군영의 좋은 자리로 영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때문에 금군청 출신의 군관은 어디 가나 우대를 받았고, 출세도 빨랐다. 물론 그중에서도 양반 출신들로 이뤄진 내금위 군관들이 가장 우대받았다. 그리고 우림위는 서얼 출신이라 품계에 한계가 있었고, 겸사복에 속한 천민이나 양인, 서얼 출신도 품계를 제한했다. 하지만 금군청 출신은 양반 출신 군인인 갑사보다는 항상 우대를 받았다.
금군청은 영조 31년(1755년)에 용호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용호영 별장은 그대로 금군별장이라고 불렀다. 또 정조 때엔 왕권 강화를 위해 숙위소나 장용영 등을 설치했는데, 이때 용호영도 그 일원이 되었다. 이후로 용호영은 계속 유지되다가 1882년에 잠시 혁파되었으나 이내 복원되었고, 1894년에 갑오개혁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용호영 폐지 이후 금군은 통위영에 소속되어 통위사의 관할 아래 놓였다.
#천인 출신 겸사복을 얕보다 괘씸죄에 걸린 두 사람
세종 7년(1425년) 11월 6일에 세종은 환관으로 겸사복이 된 유실과 또 다른 겸사복 윤길의 직첩(職牒·벼슬 임명장)을 거둬 군역에 충당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날 유실은 형장 90대, 윤길은 80대를 맞고 쫓겨났다. 그들 죄목은 사복마(司僕馬)를 조련하는 일로 해주에 가서 음식 대접을 받기도 하고, 기생을 태우고 마음대로 다녔다는 것이었다. 같은 죄를 저질렀지만 유실에게 형장을 10대 더 가한 것은 그가 아비의 삼년상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목상 그들의 죄는 죄목에 쓴 대로였지만, 그들이 형벌을 받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쓰고 있다.
처음 겸사복 홍유근은 궁인 홍 씨의 오라비로서 사랑을 받아 퍽 교만하였다. 해주에 말 조련하러 갈 적에 유근도 참여했는데, 유실과 윤길 등이 그가 천인이기 때문에 예로 대접하지 아니하므로, 유근이 원망을 품고 먼저 와서 몰래 아뢰니, 임금은 이로 말미암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궁인 홍 씨는 세종이 좋아하던 궁녀 출신 후궁 소용 홍 씨였다. 홍 씨는 비록 천인 출신이었지만 세종이 아내 소헌왕후 심 씨와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였다. 말하자면 세종에겐 첫사랑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홍유근은 바로 이 첫사랑의 오빠였다. 비록 천인이지만 여동생이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으니, 출신 신분을 가리지 않는 겸사복 직책을 주어 벼슬살이를 하게 해줬던 모양이다. 그런데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오빠를 단지 천출이라는 이유로 두 사람이 함부로 대했다는 말을 듣고 세종은 참지 못하고 홍유근을 대신하여 복수를 해줬던 것이다.
사실, 당시 해주에서 음식 대접을 받고 기생을 태우고 다닌 인물은 유실과 윤길 두 명만은 아니었다. 심지어 홍유근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그런데 홍유근을 비롯한 다른 관원들에게는 벌을 내리지 않고 유실과 윤길만 꼭 집어서 벌을 내린 것이다. 자기 연인의 오빠를 괄시한 이들에 대해 일종의 괘씸죄를 적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세종의 처사를 두고 도승지 곽존중이 공평한 처사가 아니라며 그들 두 사람에게도 죄를 주지 말라고 했다. 세종은 유실과 윤길에게만 자신이 따로 내린 명령이 있었는데,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기어코 그들 두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고 내쫓아버렸다.
세종은 흔히 공평무사하고 공명정대한 성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도 자신이 좋아하는 연인과 관련된 일 앞에서는 평정심을 잃었던 것이다. 사실 겸사복은 신분에 관계없이 무예가 출중한 무인들로 이뤄진 집단이지만, 간혹 홍유근과 같은 존재도 겸사복의 벼슬을 받곤 했다. 신분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였지만 신분을 넘어서는 벼슬을 내릴 필요가 있었고, 이때에 가장 적당한 곳이 바로 겸사복 벼슬이었다. 홍유근은 겸사복 제도의 그런 허점 덕에 영화를 누린 인물이었다.
작가
■ 용어설명 - 직첩(職牒)
조선, 대한제국 기간의 관리 임명장. 4품 이상에게는 교지(敎旨), 5품 이하에게는 교첩(敎牒)을 내렸고 통칭 직첩이라고 했다. 인사 문서뿐 아니라 유지(有旨)·홍패(紅牌)·백패(白牌)·유서(諭書) 등을 아울러 직첩이라고 부른 기록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등 자료에 따르면 인사 문서만 가리켰다. 죄를 지은 관원의 직첩을 환수하는 경우에도 인사 문서만 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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