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정신질환자’로 치부 말라… 제각기 ‘아픔’ 드러났을뿐[북리뷰]
레이첼 아비브 지음│김유경 옮김│타인의사유
‘흑인은 미치지않아’ 믿던 19C
산후 우울증 흑인 여성 이야기
종교 통해 증상 다스린 여성 등
다양한 정신질환자 사연 담아
사회적 변화과정도 함께 풀어내
여기 ‘레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상실과 우울감에 빠져 덥수룩한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발에 물집이 잡힐 때까지 정신병원의 복도를 서성거린다. 의학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다.
그렇다면 이번엔 미국의 저널리스트 레이첼 아비브가 주목한 ‘레이’에 대해 살펴보자. 이 마흔한 살의 백인 남성은 투석 사업으로 성공한 CEO였고 카리스마 넘치며 열정적인 신장학 전문의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유년 시절을 거친 후 ‘좋은 아버지’가 돼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였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 채 부인과 이혼하고 아들과 헤어지게 되자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삶을 상실한” 상태가 돼 버렸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우울증, 거식증, 조현병 등의 병명으로 알고 있던 정신질환에는 각각의 사연이 있다. 그리고 레이첼은 책에서 이 질환을 각각 레이, 바푸, 나오미, 로라, 하바라는 이름을 통해 생생하게 우리 앞에 데려온다.
레이첼이 불러온 각기 다른 사연 속에서 개개인의 노력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치료 환경이 개선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레이는 정신질환에 대한 치료 방식의 변화를 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다. 우울증에 걸린 레이가 입원한 체스트넛 롯지 병원은 약물치료가 아닌, 정신분석을 통해 우울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의사들이 많은 곳이었다. 지금은 정신질환에 대한 약물치료가 대중화돼 있지만 레이가 병원에 입원하던 1980년대만 해도 의견이 분분했다. 체스트넛 롯지 병원에서 정신분석을 중심으로 치료받은 레이는 결국 실패했다. 증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가 항우울제를 처방해 주는 병원으로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상태가 호전됐다. 그리고 1983년 레이는 잘못된 치료를 한 체스트넛 롯지 병원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끝에 “만성 우울증은 질병이 아니라 단지 성격적 결함에 불과하다는 몇몇 의사들의 관습적 믿음”을 깨버렸다.
산후 우울증을 앓은 흑인 여성 나오미의 사례에서는 나오미의 이야기와 함께 흑인의 정신질환을 대하던 미국 사회의 모습을 함께 보여준다. 미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뿌리 깊은 믿음 중 하나는 ‘흑인은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1881년 신경학자 조지 비어드는 자신의 저서에서 “문명이 없는 곳에는 신경증도 없다”고 선언하는가 하면 미주리주 주립 정신질환 시설의 원장은 동료들에게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종이 바로 미친 깜둥이였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나오미가 남편 없이 쌍둥이를 낳고 자살 시도를 한 것에 대해서도 그의 가족들은 “너는 강인한 흑인 여성이야. 기도해, 그러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만 건넬 뿐이었다.
각각의 사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정신질환의 ‘평범성’이다. 부모의 압박 속에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나 목표를 이룬 이후에 양극성 장애로 고통받은 로라의 사례나 가부장적인 환경에 대한 불만으로 조현병에 걸린 인도 여성 바푸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는 경우처럼 느껴진다. 질환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증상을 경험하고 견디는 이야기를 통해 결국 정신질환이 우리 두개골 안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닌, 우리 주변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치료의 끝이 ‘극복’이 아니라는 것 또한 주목할 부분이다. 이들이 질환을 앓고 난 이후의 과정은 처음 이들이 질환을 마주했을 때처럼 제각각이다. 어떤 이들은 치료 끝에 회복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낫지 않고 영원히 고통받다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저 살아간다.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자신의 질병에 대해 글을 쓰려고 했다. 로라는 블로그를 통해, 레이는 500쪽에 달하는 회고록을 통해 자신이 겪어온 일을 세상에 전하려고 노력했다. 바푸는 약물치료가 아닌 힌두교를 통해 정신질환을 다스린 종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시집을 써냈다. 그리고 레이첼 또한 이제 그들 중 하나다. 책의 서두에서 그는 자신이 여덟 살 무렵 거식증을 앓았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레이첼의 이야기’로 시작해 ‘하바의 이야기’로 끝나는 6편의 사연은 증명하고 있다. 모든 아픔에는 들어봐야 할 이야기가 있다. 372쪽, 2만2000원.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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