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팬심 지치면 멀리 갈 수 없다
경제의 속살 l 밀어내기 앨범 판매는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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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27일 일본 도쿄돔에서는 한국 걸그룹 뉴진스의 팬미팅 ‘버니즈 캠프’가 열렸다. 뉴진스 멤버 하니는 1980년대 당시 일본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가수 마쓰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를 불러 크게 화제가 됐다. 화려한 무대 연출과 칼군무로 대표되는 케이(K)팝이 아니라 수줍은 율동과 사랑스러운 음색에 일본 관객들은 놀랐고, 감탄했고, 감동했다. 도쿄돔을 가득 메운 수만 명의 팬들은 추억을 회상하며 한국 걸그룹 뉴진스의 베트남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멤버 하니가 부르는 일본 대중가요에 빠져들었다. 디지털 플랫폼의 발전과 함께 전세계가 함께 즐기는 K팝의 힘을 다시금 확인하는 장면이다.
K팝 가수들의 인기는 여전한 듯 보이지만 한국 엔터테인먼트산업은 꽤 깊은 골짜기에 빠져 있다. 뉴진스가 소속된 하이브의 주가는 2023년 고점 대비 26%나 하락했다. 하이브는 상황이 나은 편이다. 제이와이피(JYP)엔터테인먼트는 62%, 와이지(YG)엔터테인먼트는 60%,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는 52% 하락하며 반토막이 났다.
깊은 골짜기 빠진 엔터 회사들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주가를 끌어내린 주요 요인은 앨범 판매량이다. 물리적 음반 판매량이 묘하다. 누구나 체감할 수 있듯이 요즘 카세트테이프나 시디(CD)로 음악을 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음반이 아니라 디지털 음원으로 음악을 듣는다. 그런데 2020년 이후 음반 판매량이 크게 늘었다. 써클차트 기준 국내 연간 앨범 판매량은 2014년 737만 장에서 2023년 1억1577만 장으로 15배가 늘었다. 2020년 이전까지만 해도 연평균 33% 정도 증가했던 앨범 판매량이 2020년 이후에는 90%씩 늘었다.
K팝의 음반 판매량은 전세계가 놀랄 정도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에 따르면 2023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앨범은 세븐틴의 《에프엠엘》(FML)이었다. 2위는 스트레이키즈의 《파이브스타》(5-STAR)다. 미국 최고의 인기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앨범 《미드나이츠》(Midnights)는 4위에 불과했다. 국제음반산업협회 루이스 모리슨 데이터 책임자는 “세계 음반산업이 최근 몇 년 새 두 자릿수 성장을 지속해왔는데, 실물 음반 시장에선 K팝이 큰 공헌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K팝 앨범 판매량 증가는 하염없이 떨어지던 글로벌 물리적 음반 판매량의 감소 추세를 뒤집을 정도다. 1999년 222억달러였던 글로벌 음반 판매액은 20년 동안 단 한 해의 반등도 없이 2019년 41억달러까지 하락했다. 음반 판매 규모가 줄었다고 사람들이 음악을 안 듣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음원 판매액은 2006년 1억달러에서 2023년 193억달러로 늘었다. 그런데 K팝 음반 판매가 급증했던 2020년부터 글로벌 음반 판매량은 37억달러에서 2023년 51억달러로 반등했다.
K팝 앨범 판매의 비밀은 ‘포토카드’다. 앨범을 사면 팬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포토카드가 한두 장 들어 있다. 팬들은 포토카드를 멤버별로 모두 모으고 싶어 하기 때문에 앨범을 여러 장 사야 한다. 멤버가 5명인 아이돌 그룹의 포토카드를 모두 모으려면 앨범 5개를 사야 한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은 하나의 앨범을 여러 버전으로 내놓고 다른 포토카드를 넣는다. 버전이 2개면 앨범을 10장 사야 하고, 멤버별로 포토카드가 2종이라면 20장 사야 한다. 참고로 SM엔터테인먼트의 남성 아이돌 그룹 엔시티는 26인조 그룹이다. 포토카드는 무작위로 들어 있다. 앨범 20장을 산다고 포토카드 20종을 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명 아이돌 가수의 신규 앨범이 발매되는 날, 판매처 앞에는 음반을 산 팬들이 모이는 중고장터가 열린다. 중복해서 뽑은 포토카드를 교환하기 위해서다.
앨범을 팔기 위한 제작사의 전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앨범에 든 포토카드 외에 특정 판매처에서 정해진 기간에만 받을 수 있는 ‘미공개 포토카드’(미공포)가 있다. 판매처별로 다른 미공포를 주기 때문에 판매처 수만큼 더 사야 한다. 팬사인회도 앨범을 팔기 위한 수단이다. 앨범을 사면 팬사인회 응모권을 받을 수 있다. 무작위로 추첨하기도 하고 앨범을 많이 산 순서대로 추첨하기도 한다. 몇 장을 사야 팬사인회에 갈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아티스트의 얼굴을 1~2분 정도 보기 위해 팬들은 수십 장의 앨범을 구매한다.
포토카드는 투기적 욕망을 자극하기도 한다. 팬사인회나 공개방송에 가야 구할 수 있는 포토카드는 수량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중고시장에서 웃돈을 얹어 수십, 수백만원에 거래되기도 한다. 팔려나간 수백만 장의 앨범은 팬들의 손에 쥐어지기 무섭게 버려진다. 어차피 필요한 것은 포토카드, 팬사인회 응모권이다. 동그란 플라스틱(CD)은 쓰레기다. 신작 발매일 판매처 주변에는 팬들이 버리고 간 앨범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2024년 4월 일본 도쿄 시부야에 있는 한 공원에 세븐틴의 베스트앨범 수백 장이 버려졌다. ‘마음껏 가져가세요’라는 메모가 있었지만 누구도 가져가는 사람은 없었다. 솔직히 K팝을 좋아하는 10대, 20대 중에 CD플레이어를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나.
K-앨범판매의 비밀, 포토카드
앨범 판매를 부추기는 또 다른 요소는 초동 판매량이다. 판매량은 인기 가수의 척도다. 그런데 앨범 판매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기 때문에 발매된 지 오래된 앨범이 판매량 측면에서는 유리하다. 그래서 발매 후 일주일간의 판매량을 인기 가수의 척도로 삼는데, 이를 ‘초동 판매량’이라고 한다. 초동 판매량 1위는 2023년 10월 발매된 세븐틴의 《세븐틴스 헤븐》(Seventeenth Heaven) 앨범으로 509만 장이 판매됐다. 2위는 스트레이키즈의 《파이브스타》 461만 장이다.
초동 판매량은 아이돌의 자존심이다. 아이돌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은 팬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새로운 앨범이 발매되면 팬클럽의 화력이 집중된다. 제작사는 초동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판매사에 막대한 물량을 떠넘긴다. 이를 밀어내기라고 한다. 물량을 떠안은 판매사들은 판매를 늘릴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다. 제작사는 판매사에 팬사인회 응모권, 해당 판매처에서만 구할 수 있는 미공개 포토카드를 쥐어준다.
어차피 포토카드를 모으기 위해 앨범을 여러 장 사는 거라면 뽑기를 하지 말고 포토카드를 여러 장 넣고 가격을 높이는 편이 더 상식적이다. 그런 시도도 있었다. 세븐틴은 베스트앨범을 발매하며 앨범마다 포토카드 전 종을 넣었다. 팬들에게는 환영받을 일인데 가격이 문제였다. 일반적인 앨범 가격은 1~2만원인데 앨범이 정식 판매가 되기 전 유통사에서 제시했던 가격은 무려 17만8천원이었다.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는 원성이 일자 소속사는 “운영상의 오류로 최종 가격이 아니라 최초에 기획했던 가격으로 잘못 안내가 됐다”며 ‘가격 표기 오류’라고 해명했다. 소속사는 앨범 가격을 6만9500원으로 수정했다. 표기 오류라는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포토카드 뽑기가 도를 넘었다는 걸 알면서도 매출을 포기할 수 없는 엔터테인먼트사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포토카드 뽑기 풍토의 결정적 장면은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기자회견이었다. 민 대표는 팬을 돈벌이로만 생각하는 엔터테인먼트산업의 현실을 비판하며 “랜덤카드 만들고 밀어내기 하고 이런 짓 좀 안 했으면 좋겠다”고 일침을 날렸다. 과도한 포토카드 장사는 열혈팬들조차 지치게 했다. 2023년 11월 매달 1500만 장까지 팔리던 앨범 판매량은 2024년 2월 매달 500만 장대로 떨어졌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의 주가도 함께 떨어졌다.
비정상적으로 늘었던 앨범 판매량은 정상화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들도 무리한 앨범 판매보다는 팬들에게 감동을 주는 콘서트, 공연으로 비중을 옮기고 있다. 2024년 1분기 SM엔터테인먼트의 음반 매출은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39% 줄었고 하이브는 21.4%, JYP엔터테인먼트는 24% 감소했다. 하지만 공연 매출은 SM엔터테인먼트 106%, 하이브 74%, JYP엔터테인먼트는 355% 증가했다.
엔터테인먼트는 사람이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산업이다. 감동을 주고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산업이다. 뉴진스의 〈푸른 산호초〉에 감동받은 팬들은 다시 앨범을 사고 굿즈를 사고 공연장을 찾을 것이다. K팝의 인기는 과거처럼 특정 노래가 잠깐 인기를 끌다가 사라지는 수준이 아니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젓는다는 식으로 팬과 아티스트를 소진시키는 방식으로는 지속가능한 산업이 될 수 없다. K팝의 미래는 더 많은 아티스트들이 더 오랫동안 팬들과 함께 좋은 추억을 만들며 문화적 영토를 넓혀갈 때 더욱 밝을 것이다.
권순우 <삼프로TV> 취재팀장 soon@3pro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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