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기의 과유불급] 우크라이나는 지지 않는다
(시사저널=전영기 시사저널 편집인)
사람은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일 수도 있으나 국가는 속성상 언제나 이기적이다. 국가가 이타적이어서 타국에 기꺼이 자기를 내어 준다면 그 나라 국민은 다른 나라 사람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서 주인으로 살고 싶지 더 큰 나라라고 그 밑에서 종노릇하는 걸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국이라도 침략 대국한테 쉽게 항복하지 않고 싸우는 이유다.
서울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청년들의 감사 콘서트'
파리올림픽에 나간 우크라이나 선수들의 뜨거운 조국애와 그들이 메달을 딴 뒤 세계를 향해 러시아를 규탄하는 모습을 접할 때 콧등이 시큰거리거나 눈시울이 붉어진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필자도 그런 편에 속한다. 직접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아버지 세대로부터 "6·25 동란 때 대국(소련·중국·북한 공산주의 동맹국)의 침략과 도와주던 미국의 막판 주춤거림 사이에 나라가 바람 앞 촛불처럼 위태로웠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나는 한국의 1950년대와 너무 닮은 지금 우크라이나의 청년들 행동에 동감하고 그들을 응원한다.
우크라이나 여자 펜싱의 영웅 하를란(33)은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자신에게 패배한 러시아 선수가 악수를 청하자 검을 내밀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나라를 빼앗길 위험에 처한 약소국 젊은이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서늘하게 보여준 장면이었다. 올림픽의 인류애나 스포츠맨십 같은 이타성은 두 번째 문제였다. 조국의 생존, 이기적 국가를 지키는 게 첫 번째 가치였다. 하를란은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내 전략은 감정을 제쳐두는 것이다…우크라이나, 내 조국, 그리고 조국을 지키는 사람들이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전선에 나가 있는 동료 젊은이들을 위해 미리 준비한 발언이었다. 십수억 명 지구인에게 대국의 침략 만행을 상기시키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게 하를란의 전략이었다. 그가 메달을 따지 않았다면 주어지지 않을 기회였다.
하를란의 메시지가 타전된 8월5일 저녁 서울시청 앞 잔디광장의 가설 무대. '슬기로운 여성행동'(상임이사 윤경숙)이라는 시민단체가 주최한 '우크라이나 청년들의 감사 콘서트' 행사장이다. 15세에서 23세까지 우크라이나 중고교·대학생 40명이 등장했다. 그들은 K팝과 K드라마로 우리말을 따라 배운 보컬 밴드와 댄스 동아리 회원들이다. 한국과 한국인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어요. 우리를 도와준 한국 국민에게 감사드립니다"라고 유창한 한국어로 외쳤다. 여성 4인조 보컬 밴드 '리드니'(가족이라는 뜻)는 한이 깊게 밴 청아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불렀다. 가사 중 "청천 하늘에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희망도 많다"라는 대목이 별처럼 빛났다. 전쟁의 나라 청년들은 수심이 없을 리야 없겠지만 그보다 희망과 재건을 굳게 믿고 있었다.
리드니의 리더는 "우리는 전쟁이 끝나면 우크라이나를 한국처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비장하게 얘기했다. 40명 청년들은 마지막 일정인 롯데월드 관람을 즐기고 8월7일 제 나라로 돌아갔다. 이 가운데 남자 9명은 귀국 뒤 전원 전쟁터로 나갈 징집 예정자들이라고 한다. 떠나는 날까지 그들 누구에게서도 두려워하는 표정을 찾아보지 못했다.
"9명 남자 청년들, 귀국한 뒤 전원 전선으로"
파리에서든 서울에서든 우크라이나 청년들의 말과 몸가짐에 어른스러움이 느껴진다. 6개월 전 젤렌스키 대통령이 밝힌 그 나라 군인의 2년간 공식 전사자 수가 3만1000명이다. 주변의 죽음이 젊은이들을 단련시켰는지 모르겠다. 파리와 서울에서 약소국 청년들이 서로 짠 듯 전선에 나간 동료들을 최우선으로 중시하고, 참전 행렬에 뛰어드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지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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