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하듯 ‘묶음 조문’…그 자리에 내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문영 기자 2024. 8. 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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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의 당신은 소설] 01 _분향소의 형범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한 송이만 가져가도 될까요?”

국화를 올리라고 설치한 분향소에서 국화를 얻어가는 남자가 있었다.

종일 장맛비가 쏟아지던 일요일(7월7일)에 형범(가명·33)이 우산도 없이 시청 오르막길을 올랐다. 저녁 8시까지 운영하는 합동분향소가 문을 닫기 직전에야 도착한 그가 23명 앞에서 젖은 옷을 매만졌다. 고속열차를 타고 대전까지, 무궁화호로 갈아타고 수원까지, 시내버스로 옮겨 타고 화성시청까지 온 그는 조문객을 응대하는 공무원에게 국화를 받아 헌화했다. 묵념을 하다 말고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과 담배·라이터를 꺼내 바닥에 내려놨다. 형범이 큰절을 했다. 일배. 재배. 다시 묵념. 2주 전 리튬전지 생산공장 폭발(6월24일 아리셀 참사)로 목숨을 잃은 얼굴들이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언제쯤 장례를 치를 수 있을까요?”

마치지 못한 의식이 남은 듯 서성이던 형범이 물었다. “그 내용은 잘 모르겠다”고 공무원은 답했다. 형범은 알고 있었다. 분향소 앞에서 첫 추모제가 예정돼 있던 날 시청에서 유가족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일정이 취소됐으니 올 필요 없다’고 허위 안내한 사실(시위라며 불허)을 그는 뉴스로 보고 왔다.

“빨리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빨리 해결되지 못해 몇 번이고 다녀와야 했던 분향소들을 떠올리며 형범이 말했다. 5시간을 길에 뿌린 여정의 ‘목적’은 5분 만에 끝이 났다. 고개 돌려 얼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구천에서 너무 오래 떠돌지 마시길.”

분향소를 나오던 형범이 잊었다는 듯 다시 뛰어들어갔다. 국화 한 송이를 청했다. 허락을 구하며 머리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잘 쓰겠습니다.”

두 손으로 꽃을 감싸 쥔 그의 등에선 이미 부산에서부터 가져온 한 송이 국화가 가방에 고이 꽂혀 있었다.

“방마다 헌화해도 될까요?”

2년 전 광주광역시 한 장례식장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서 형범이 국화를 올린 뒤 물었다. 겨울 새벽 공기에 빨갛게 언 그의 얼굴을 보며 유족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설 중이던 고층아파트가 무너져 내리던 순간 대피할 틈 없이 콘크리트 더미에 깔린(2022년 1월 화정 아이파크 붕괴) 현장 노동자들의 분향소였다. 층별로 흩어져 있던 시신을 수습하고 건설사와 합의 끝에 48일 만에 치르는 장례식을 몇 시간 남기고 그는 도착했다. 형범이 희생자들의 개별 빈소를 찾아다니며 국화를 올리고 절을 했다. 퇴근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오느라 먼지투성이 작업복 차림 그대로였다.

“이리 오세요.”

공동 발인을 앞두고 마지막 술잔을 나누던 유족들이 그를 불렀다. 소주를 따르던 유족이 “운전하셔야 되냐”고 묻자 형범이 고개를 저으며 술을 받았다.

“차는 없습니다. 이것저것 갈아타며 왔어요.”

분향소의 24시간 운영 여부는 출발 전 형범의 필수 확인 사항이었다. 하루 일을 끝내고 부산에서 전국의 외진 분향소들까지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다 보면 자정 가까운 시각이나 날짜가 바뀐 새벽에 닿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오전엔 택배사 서브터미널로 들어온 상품을 내리고 오후엔 배송 나가는 트럭에 상품을 싣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상하차 업무 사이 짬이 날 땐 뉴스를 살폈다. 대형참사가 터지면 속보를 챙겨보며 진행 상황을 좇았다. 새로 발생한 인명사고는 없는지 날마다 주시했다. 뉴스에 공개되지 않은 분향소 위치는 지역 관공서나 소방·경찰서, 병원, 때에 따라 정부 부처에까지 전화해 물었다. ‘취재’로 장례식장을 알아내면 ‘이것저것 갈아타며’ 새벽에라도 도착해 조용히 헌화했다. 유족이 “누구시냐”고 물으면 “조문 온 시민”이라고만 했다. 구석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고 나왔다. 슬픔을 조금이라도 떼어냈길 바라며 첫차를 기다렸다.

11년 전이었다. 폭우로 불어난 한강 물이 공사 중이던 상수도관을 밀고 들어가 노동자 7명의 생명을 빼앗은 현장(2013년 7월 서울 노량진 배수지 수몰) 근처에 형범은 있었다. 거대한 구멍에서 주검이 돼버린 몸들을 목격한 그날부터 형범은 시킨 사람 없는 숙제를 하듯 희생자들의 분향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한 남자가 서울 오패산 터널 쪽에서 사제총을 난사(2016년 10월)했을 때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경찰관의 빈소에 국화를 올렸다. 서울 성북구에서 아파트 입주민에게 폭행당한 경비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2020년 5월)도 경비실 앞에서 묵념했다. 수해 실종자 수색에 투입됐다가 급류에 휩쓸려 사망(2023년 7월)한 해병대 상병과 신병교육대에서 얼차려를 받고 숨진(5월23일) 훈련병의 빈소에서도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 사방에서 억울한 죽음들이 탑처럼 쌓였다. 지금까지 그가 조문한 분향소만 100여곳이었다.

“꽃 한 송이 올리려고 왔습니다.”

형범이 폴리스라인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비 내리는 아스팔트를 막고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분향소에서 불탄 리튬전지 공장까지 20㎞ 거리였다. ‘어차피 올라가는 김에’ 출발할 때부터 동선에 넣은 일정이었다. 형범이 경찰의 안내를 받아 공장 앞에 이르렀을 때 밤보다 시커먼 건물이 불 냄새를 풍겼다. 고향 제천에서 29명의 삶을 앗아간 스포츠센터 화재(2017년 12월) 현장에 헌화했을 때도 그 냄새가 맹렬했다. 형범이 가방에 꽂아둔 국화를 꺼냈다. 울타리 사이에 끼우고 고개를 숙였다. 그 자리에 두려고 부산에서부터 데려온 꽃이었다.

주말마다 형범은 전국의 죽음을 찾아 일주했다. 그는 묶음 배송처럼 조문도 묶어서 했다. ‘어차피 가는 김에’ 비슷한 시기에 차려진 분향소들을 한데 묶었다. 어차피 간다고 하기엔 너무 먼 거리의 빈소들이 ‘묶음 조문’의 동선 위에 놓였다. 광주 아파트 붕괴 참사 분향소에 도착하기 몇 시간 전 형범은 여수국가산업단지 화학공장 폭발(2022년 2월) 희생자들의 빈소를 찾아갔다. 수원에서 위안부 피해자 안점순 할머니를 애도한 뒤엔 전날(2018년 3월) 국도변에서 야생동물 구조 중 대형 트럭에 치여 사망한 소방관 3명의 아산 분향소로 향했다.

동선 중간에 교통편이 끊길 땐 멈춘 도시에서 추모했다. 불붙은 감귤창고에서 80대 노부부를 대피시키다 사망(2023년 12월)한 소방관을 조문하러 제주도에 다녀오던 날이었다. 부산행 비행기표가 매진되자 형범은 진도 팽목항으로 가는 배표를 끊었다. 몇 해 전 그가 제사상을 차렸던 항구 모퉁이를 찾아 두 손을 모았다.

그해 형범은 북어포와 약과, 떡과 빵, 배와 사과 한 알씩을 챙겨 팽목항에 갔다. 소반에 올린 뒤 양쪽에 촛불을 켰다. 상 앞엔 향불을 피웠고 맞은편 고인들의 자리엔 스티로폼 상자를 뒀다. “세월호 희생자 신위”라고 쓴 지방(紙榜) 세 장을 단원고 학생과 교사, 일반인 별로 준비해 상자 겉에 나란히 붙였다. 상자 안엔 재를 담아 왔다. 그가 희생·실종자 수에 맞춰 노란 리본 304개를 태운 재였다. 형범이 무릎을 꿇고 절했다. 일배. 재배. 묵념. 재를 바다에 뿌렸다.

제사상은 그의 방에서도 차려졌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서 차렸고, 연평해전과 천안함 전사 장병들을 위해서도 차렸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기릴 땐 좁은 고시원 방을 나와 근처 철거촌 공가에 상을 폈다.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들 했다. 그때마다 형범은 “안타까워서”라는 말 외엔 논리적인 설명을 하지 못했다. 논리 대신 두려움이 있었다.

2017년 5월 거제도의 한 조선소에서 800t 골리앗 크레인과 32t 타워크레인이 충돌하면서 노동자 6명이 죽고 25명이 다쳤다. 2021년 1월엔 대기업 택배사 물류터미널에서 상차 레일을 당기다 난간 아래로 떨어진 노동자가 후진하던 트레일러에 치여 사망했다. 모두 당시 형범이 일하던 직장이었다. 마침 쉬는 날이거나 작업조가 달라 사고는 피했지만 형범은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전국의 분향소들을 찾아다니다 보면 그 죽음의 현장마다 자신의 일터가 겹쳐졌다. 리튬전지 공장에서 숨진 동포·외국인들의 영정에선 그가 일하는 택배 터미널의 외국인 노동자들 얼굴이 보였다. 평소엔 모른 척하다 죽어나간 뒤에야 한번쯤 봐주는 얼굴들이었다. 그 얼굴들을 볼 때마다 ‘언젠가 저 가운데 내 얼굴이 있을 수도 있다’는 오싹함에 뒷목이 시렸다. 이 사회가 누구의 얼굴을 깔고 앉아 지탱되는지 사람들은 잘 아는 만큼 잘 잊어버렸다.

형범이 스마트폰으로 심야버스 노선을 확인했다. 이것저것 갈아타며 찾아갈 다음 목적지는 서울시청이었다. 9명이 목숨을 잃은 역주행 사건 현장에 꽃을 올려야 그날의 묶음 조문도 끝이 날 것이었다. 화성시청 분향소에서 가져온 국화가 ‘잘 쓰기도 전에’ 그의 손에서 시들고 있었다.

이문영 | 토요판부 기자. 책 ‘웅크린 말들’ ‘노랑의 미로’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루카스’ 등을 썼다. 세기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진 못해도 누구든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小說)의 주인공은 될 수 있다. ‘이야기의 자격’을 인정받은 적 없는 이야기들이 글이 되고, 읽히고, 연결될수록 언어와, 기록과, 서사의 틈들도 조금은 메워질 것이라 믿는다. 부끄러운 것이 많다.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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