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탄에 쑥대밭 된 일본…교토·도쿄도 불바다 될 뻔했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폭격기 '에놀라 게이'에는 5t에 달하는 거대한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매달렸다. 조종사들은 청산가리를 지급받았다. 어쩔 수 없이 적지에 착륙할 경우에 쓸 비상용이었다. 에놀라 게이와 나머지 두 대의 전투기는 초승달 빛을 헤치며 밤하늘을 날았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오전 8시15분 15초, 마침내 폭탄 투하실 문이 열리고, 리틀 보이가 밝은 햇살을 갈랐다. 43초 후, 조종석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은 빛으로 가득했고, 충격파가 폭격기를 때렸다. 곧이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끔찍하게" 솟구쳐 오르는 구름이 조종사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아래 히로시마는 "타르 양동이처럼" 검게 끓어올랐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전무후무한 공포를 자아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 보이는 순식간에 7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또 다른 7만명이 곧이어 그 뒤를 따랐다. 도시의 60%가 파괴됐고, 약 10㎢의 땅에는 파괴된 건물 잔해도 보이지 않았다. 도시는 마치 "무시무시한 바람에 휩쓸린" 평평한 잿빛 황무지처럼 변했다.
압도적인 위력 앞에 미군과 일본군의 희비는 엇갈렸다. 오키나와에서 출격을 기다리던 미 해병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본 본토에서 전면전이 벌어지면 30만명 넘는 미군이 죽을 것으로 관측됐기 때문이다. 땅굴까지 파며 전면전을 준비하던 일본군은 넋이 나갔다. 처음에는 폭탄의 위력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1억명이 다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며 항전 의지를 다졌다.
기자 출신 작가인 에번 토머스가 쓴 '항복의 길'(Road To Surrender)은 일본 제국이 무너지는 과정을 조명한 논픽션이다. 미국 전쟁부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 원자탄 작전을 실질적으로 이끈 칼 스파츠 장군, 그리고 자멸의 수렁에서 일본을 구한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를 중심으로 급박하게 돌아갔던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를 압축적으로 그렸다.
히로시마에 폭탄이 떨어지자 일본 최고전쟁지도회의는 분열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였던 도고 시게노리는 항복을 주장해 전쟁지도회의에서 나 홀로 '왕따'였다. 그러나 히로시마 폭격 이후 항복과 항전 의견은 3대3으로 팽팽히 대립했다. 군부는 항전 의지를 다졌다. 정규군 90만명이 이미 규슈 방어에 돌입했고, 7천 대의 '가미카제' 전투기도 준비돼 있었다. 그러나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까지 파멸하자 육군 대신과 해군 대신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백기 투항할 순 없었다. 수하들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대신들은 항복에 참여하면 분노한 젊은 군인들의 칼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젊은 군인들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의 스팀슨 장관은 원자폭탄을 투하하더라도 교토만은 피해달라고 군부를 설득했다. 군 일각에선 일본에 결정타를 날리려면 문화유산이 풍부하고, 핵심지역인 교토와 수도인 도쿄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팀슨 장관은 마뜩잖았다. 그는 일전에 교토를 방문해 본 적이 있어 일본인들이 교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았다. 교토를 공격하면 전면전이 불가피했다. 또한 도쿄는 지난 3월에 진행한 소이탄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8만5천명이 사망했다. 그런 곳에 다시 원자탄을 쏠 수는 없었다.
저자는 항복파와 항전파로 나뉜 일본 최고전쟁지도회의의 갈등 상황, 원자탄에 대한 미국 지도부의 입장 변화, 예측 불가한 소련의 태도 등 당시의 복잡하면서도 급박한 상황을 등장인물들이 남긴 일기와 각종 기록을 토대로 현재 시제로 재구성해서 들려준다.
특히 전쟁을 끝내야겠다는 각오와 함께 민간인 살상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한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묘사, 말이 아니라 고갯짓과 눈깜박임 등으로 은연중에 속내를 내비치는 '하라게이'(뱃속 기예)에 정통한 일본 군부 인사들의 욕망과 두려움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아울러 능구렁이 같은 트루먼 대통령, 이기적이며 야심만만한 맥아더 장군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의 면면도 생동감 있게 전한다.
까치. 조행복 옮김. 392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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