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의 중국萬窓] 운무 자욱한 仙界 여산, 중국 최고의 전원시인 도연명을 낳다

강현철 2024. 8. 9.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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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호남성(湖南省·후난성) 북부의 상덕(常德·창더)시 도원(桃源)이라는 조그만 마을엔 도화원(桃花源)이라는 곳이 있다. 홍진(紅塵)의 세상 밖에 있는 천국 같은 땅인 무릉도원이라며 만들어놓은 정원이다. 뜰 곳곳에 연못을 파고 복숭아 나무를 심어, 연분홍 복사꽃이 떨어지는 봄철이면 복사꽃 물결을 따라가던 어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물론 이곳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이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그려낸 유토피아 무릉도원은 아니다. 무릉도원은 무릉의 복사꽃 물결이 흘러나오는 근원지라는 뜻이다. '도화원기'는 여러 화가들의 그림 소재가 됐는데, 조선의 화가인 안견도 '몽유도원도'를 남겼다.

도연명의 이름은 잠(潛), 호는 버들을 좋아한다고 해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며 자(字)는 연명이다. 동진 시대 지방 하급 관리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이내 접고 평생 은둔하며 시를 지었다. 한평생 술을 좋아해 '술의 성인'으로도 불린다.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문인이었던 안연지가 2만냥의 돈을 주자 술집에 맡겨놓고 한푼 남기지 않고 술마시는 데 써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중국 전원(田園) 시인의 최고봉, 남북조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춘추전국 시대가 동아시아 사상의 모태였다면, 또다른 난세였던 위진남북조 시대는 동아시아 예술의 모태였다.

◇ 역대 문인들이 즐겨 찾은 여산

도연명은 강서성(江西省·장시성) 최북단의 구강(九江·주강) 출신이다. 오랜 역사문화 도시인 구강은 호남·호북·강서·안휘성 교차지인 교통의 요지로, '천하의 눈썹과 눈에 해당하는 땅'(天下眉目之地·천하미목지지)으로 불려왔다. 구강의 명승지는 여산(廬山·루산)이다. 최고봉인 한양봉(1474m)을 비롯, 170여개의 봉우리와 14곳의 호수가 있는 여산은 봉우리들이 연중 200일 이상 운무에 둘러싸여 있어 사진 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광산(匡山) 또는 광려(匡廬)라로도 불리는데, 고대 주나라때 광씨 7형제가 이곳에 살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태산(泰山·타이산)과 여산은 각각 장강(長江·양쯔강) 이북과 이남에 위치하면서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대표하는 명산으로 꼽힌다.

여산은 옛부터 세상을 피해 정신적 안식처를 찾으려는 승려, 시인, 학자들의 터전이었다. 불교·도교·유교가 공존하고 있다. 동진 말엽에 입산한 고승 혜원(慧遠)은 오랜 수행 끝에 정토종(淨土宗)을 창시했으며, 386년에 그가 세운 동림사는 정토종의 본산이 됐다. 여산은 정토종 외에도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황룡종(黃龍宗) 등 여러 불교 종파의 중심지가 됐으며, 남북조 송대에는 도가의 육수정(陸修靜)이 백운봉(白雲峯)에 도교 사원을 세웠다. 전한때 치욕적 궁형을 받은 사마천이 입산해 중국 최초의 역사서 '사기'를 지었고, 후한대에는 파르티아(페르시아) 왕자 출신으로 승려가 된 안세고가 불경을 한자로 번역한 역경 작업을 한 곳도 이곳이었다. 또 송대 유학 교육의 발원지로, 유학의 제2 전성기를 이끈 주희가 세운 백록동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백록동서원은 유교 문화 전파의 선봉 역할을 하면서 동아시아권의 유교 교육과 인재 양성에 공헌했다. 내노라하는 문인들도 앞다퉈 여산을 찾았다. 남북조 시대 중국 최고의 명필로 '난정서'(蘭亭序)를 남긴 왕희지가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5세기 초엽 도연명도 입산해 여러 시를 남겼는데, 그의 거처에는 후에 그를 기리는 정절서원(靖節書院)이 세워졌다. 8세기 이후 당송팔대가도 여산을 즐겨 찾았다. 당대의 이백 두보 백거이 왕유 맹호연 한유 유종원 등과 송대의 소식(소동파), 황정견, 육우, 신기질 등의 대가들은 여산에서 도연명을 추모하고 숭앙했다.

橫看成嶺側成峯 (횡간성령측성봉, 옆으로 보면 고갯마루 가로 보면 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 (원근고저각부동,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제각기 다르구나)

不識廬山眞面目 (부지여산진면목, 여산의 참모습 알 수 없는 것은)

只緣身在此山中 (지연신재차산중, 다만 이 몸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라네)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의 '제서림벽'(題西林壁, 서림사 벽에 쓰다)이란 시다.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이란 구절은 이후 '사물의 실체는 파악하기 어렵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 도연명의 대표작

여산은 도연명을 낳고, 도연명의 시를 길러낸 토양이다. 도연명은 애주가답게 '음주'(飮酒)라는 제목의 시를 많이 남겼다. 그가운데 음주 제 5수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결로재인경 이무거마훤, 오두막을 짓고 사람사는 곳에 있으나, 수레와 말소리 시끄러움이 없네)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문군하능이 심원지자편, 그대는 어찌 그럴 수 있나, 마음이 머니 사는 곳도 절로 아득하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산기일석가 비조상여환, 해 지니 산 기운 아름답고, 날던 새들도 짝지어 돌아오네)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차중유진의 욕변이망언, 이 가운데 참뜻이 있거늘, 말 하려 해도 할 말을 잊었도다)

남산(南山)은 여산이다.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은 명구다. 겸재 정선의 '동리채국도'(東離採菊圖)와 '유연견남산도'(悠然見南山圖)는 도연명의 이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국화향이 그윽한 가을 해질녁, 국화꽃을 들고 아름답게 노을지는 여산으로 새들이 돌아오는 모습은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다.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 하다. 중국 시나 그림에서 자연이나 형상은 오랫동안 정신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가령 두보의 명시 '절구'를 보자.

絶句(절구)

江碧鳥逾白 (강벽조유백, 강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山靑花欲然 (산청화욕연, 산이 푸르니 꽃 빛 불붙는 듯하다)

今春看又過 (금춘간우과, 올 봄이 또 지나가나니)

何日是歸年 (하일시귀년, 어느 날이 돌아갈 해인가)

늦은 봄날 파란과 흰색, 녹색과 분홍색의 대비 속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시인의 안타까운 마음이 경물(景物)을 통해 한폭의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도연명의 시는 이백이나 두보와는 다르다. 이백은 호쾌함을 노래했지만 늘 벼슬자리에 못나간 아쉬움이 배어 있다. 두보는 간난고초에 찌들어 자연 또한 어둡고 슬프다. 반면 도연명은 고된 농사를 지으며 살면서도 담박함을 잊지 않았다. 자연은 나와 한몸이다. '귀거래혜 전원장무호불귀'(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돌아가야지,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로 시작하는 '귀거래사'(歸去來辭)는 팽택현에서의 짧은 현령 생활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남긴 시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부해의, 오로지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귀거래사의 마지막 구절이다.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에서 "한 잎의 갈대 같은 배가 가는 대로 맡겨 일만 이랑의 아득한 물결을 헤치니, 넓고도 넓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탄 듯하여 그칠 데를 알 수 없고,가붓가붓 나부껴 인간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아나 신선(神仙)이 돼 오르는 것 같다"고 한 것은 도연명의 시풍을 닮았다.

◇ 도연명의 시 세계

도연명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서 "좁은 방은 쓸쓸하기만 하고 바람과 햇빛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한다. 짧은 베옷을 기워 입고, 밥그릇이 자주 비어도 마음은 편안하다. 항상 문장을 지으며 스스로를 즐기면서 자못 자신의 뜻을 나타내려 하였다. 득(得)과 실(失)에 대한 생각을 잊고서, 이러한 상태로 자신의 일생을 마치려 하였다"고 스스로에 대해 말했다.

소동파는 도연명에 대해 "나는 시인들에 대해 좋아하는 바가 없다. 오직 도연명의 시만을 좋아하는 데 그는 시 작품이 많지 않다. 조식 유정 포조 사령운 이백 두보 등 여러 시인들 모두가 도연명의 시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도연명의 시문만을 좋아하겠는기? 그 사람 됨됨이의 경우도 실로 느끼는 바가 많다"고 했다. 청나라 말기 계몽주의자였던 양계초(梁啓超)도 "사람들의 불평 중 대부분은 부풀린 것으로 가볍게 믿을 게 못된다. 그러나 도연명은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가장 진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도연명을 평가했다.

도연명은 자연을 사랑하고, 자유를 그리워한 시인이다. 인생의 영욕과 이해 득실에서 떠난 초연하고 담담한 언어로, 자연의 아름다운 정취를 표현했다. 마음 깊이 전원 생활을 사랑한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와 내용으로 격조높은 시들을 지어냈다. 속세를 벗어나 물흐르듯 자연의 순리에 몸을 맡긴 신선 같은 정취가 느껴진다. 조선 시대의 선비들도 도연명의 시취(詩趣)에 빠져들곤 했다. 조선 시대의 시가 문학이 당송의 영향을 받았고, 당송의 문학은 도연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강현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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