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오아시스'로 꼽은 디스토피아·비극문학 작품들[책볼래]
"상상력과 창의성 자극, 모든 스트레스에 대처"
작품 속 비극적 인간의 삶에 관심과 공감 촉구해
"나는 비극 작가들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들의 작품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우리 자신의 개인적 드라마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의 운명을 위해 울면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자신의 공허함과 결점, 외로움을 위해 울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과 시를 좋아해 '독서광'으로 불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4일(현지시간) 예비 사제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문학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며 "이를 외면하는 것은 아무리 신학을 공부한들 심각한 지적 및 영적 빈곤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급진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964년 아르헨티나 산타페의 예수회 학교에서 2년간 문학 교사로 일했던 경험을 꺼내기도 했다.
당시 학생들에게 중세 에스파냐의 명장 엘 시드(El Çid)에 관해 가르쳐야 하는 수업이었지만 학생들은 스페인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에 더 관심이 많았다며 엘 시드는 집에서 읽어오도록 했고, 학생들이 좋아했던 작가 가르시아 로르카에 대해 수업했다고 술회했다.
더불어 자신의 문학적 취향이 비극 문학이라고 밝힌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른 사람들이 그 것이 필수적이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의무감 때문에 무언가를 읽는 것보다 역효과적인 것은 없다"고 역설했다.
교황은 전도자로 평생을 살았던 사도 바울이 독서광이었다는 점을 언급하며 "독서는 상상력과 창의성을 자극하고 어휘력 확장과 집중력 향상, 인지 저하와 불안과 같은 스트레스를 감소시켜주는 것은 물론,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준다"며, "특히 소셜미디어(SNS), TV, 스마트폰, 가짜뉴스와 같은 몰입을 방해하는 것으로부터 문학은 우리를 지켜주는 해독제와 같은 오아시스"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치고, 분노하고, 실망하거나 실패한 순간 기도만으로는 내면의 평온을 찾지 못할 때 좋은 책은 마음의 평화를 찾을 때까지 폭풍우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예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요 연설과 글에는 늘 전 세계의 유명 작가와 무명 작가의 작품 인용문이 항상 삽입되어 있다.
'형성에서 문학의 역할'(ON THE ROLE OF LITERATURE IN FORMATION)이라는 제목의 이번 공개 서한에도 C.S. 루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T.S. 엘리엇,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파울 첼란 등과 같은 문학 거장에 대한 인용으로 포함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문학에 대한 사랑은 역대 교황 누구보다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학과 성경을 최고로 가치이자 완전한 언어(말씀 Logos)로 삼아야 하는 종교인이지만 문학의 언어에 깊이 사색한 이유가, 특히 비극에 둘러싸인 인간의 삶 한 가운데에서 귀 기울이고 공감했던 예수의 행적과 맞닿아 있음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2023 노벨문학상을 받은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에게도 서한을 보낸 바 있다. 물론 그가 가톨릭 신자라는 점이 고려 됐겠지만 수 많은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보다 가족관계와 세대간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인생, 사랑과 죽음 같은 우리의 삶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모습들을 담으려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
교황은 서한에서 포세에게 "당신의 온화하고 헌신적인 문학적 목소리가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다가갈 것"이라며 "때론 어두워진 세상에서 신앙의 순례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삶을 반드시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찬사를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언급한대로 시와 소설을 즐겨 읽으며 특히 디스토피아, 비극 문학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 즉위한 첫 해 가장 먼저 언급된 작품은 프랑스 작가 조르주 베르다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다.
1930년대 신을 향한 믿음이 사라져가던 시대, 프랑스 북부의 작은 시골마을 알브리쿠르성당에 젊은 신부가 부임해온다. 병약한 신부는 가난과 욕망, 권태와 타성에 젖은 마을의 모습을 목격하고 깊은 슬픔과 고뇌에 휩싸이는 모습을 그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세 번 읽었는데, 또 읽으려고 책상에 놔둔 책"이라고 말해 화제가 된 책이 있다. 단테의 뒤를 잇는 이탈리아 문학사의 거장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역사소설 '약혼자들'이다.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장편소설로 평가받는 이 소설은 밀라노 폭동, 30년 전쟁,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던 17세기 초의 롬바르디아를 무대로, 악독한 그 지방 태수와 비겁한 교구 사제들 때문에 쉽사리 결혼하지 못하는 두 농사꾼 연인의 투쟁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근현대 디스토피아 소설 장르의 시초라 불리는 로버트 휴 벤슨의 1907년작 '세상의 주인'도 빼놓을 수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방문지였던 필리핀에서 이 책을 언급하며 "모든 사람이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디스토피아 소설은 한 차례 더 교황의 입에 오르내리며 2020년 처음으로 국내 완역 출간됐다.
전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고 막강한 권력을 쥔 인본주의 세력에 맞서는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을 그린 이 소설은 사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이지만 '1984'의 조지 오웰, '반지의 제왕' J. R. R. 톨킨, '나니아 연대기'의 C. S. 루이스를 비롯해 SF 소설의 거장 H. G. 웰스의 '다가올 세상' 등에 영감을 준 작품으로 유명하다.
근미래 미국의 한 정치인이 전쟁 직전 위기에 처한 동방과 서방의 화합을 이끌어 내며 혜성처럼 등장한 줄리안 펠센버그가 열렬한 지지 속에 세계 대통령에 등극한다. 인류 역사상 처음 이뤄진 세계평화에 열광하지만 사상적 통합을 강조하며 종교인들을 탄압하고 시민들은 폭력과 광기로 동조한다.
위대한 가치를 표방하는 사상들이 어떻게 변질되며,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소설은 흥미진진하게 드러낸다. 정부 관료나, 평범한 시민이나, 인본주의 운동에 동참한 변절한 성직자들은 모두 일시적인 감정과 헛된 열망에 사로잡혀 펠센버그에게 빠져들었다. 펠센버그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고 난 뒤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은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인간은 세상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을까?
이 책은 지나친 물질주의와 맹목적인 인본주의가 초래할 거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심지어 근미래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예언해 큰 주목을 받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외에도 자신에게 영향을 준 책들을 여러 차례 소개하기도 했다.
특히 그가 자주 언급하는 작가는 '죄와 벌'로 유명한 표도르 도스도옙스키다. 19세기 러시아의 불안한 정치, 사회, 영적 분위기에서 인간의 심리를 탐구하며 다양한 현실적인 철학과 종교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들로 유명하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장 좋아하는도스도옙스키의 소설로 알려진 '지하 생활자의 수기'가 있다. 뿌리가 박탈된 '지하실의 남자'가 시대를 적대함으로써만이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적의에 찬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는 이 초라하고 고독한 공간에서 바깥 세상의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을 비웃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한다.
도스도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 명작으로 꼽은 소설이다. 부자간의 재산 다툼, 한 여자를 둘러싼 갈등, 결국 이런 반목에서 이어지는 친부 살해라는 다분히 선정적인 소재에 범죄소설이나 추리소설 기법으로 쓰인데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나가며 수 많은 독자들의 손을 붙잡은 작품이다.
시에 대한 애정도 빼놓을 수 없다. 헤르만 헤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발터 벤야민 등이 극찬했던 독일 태생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의 '빵과 포도주'로 대표되는 그의 시는 궁핍한 시대의 암울한 고통, 문학과 삶에 대한 현장감 넘치는 비유를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오늘날 독일 현대 시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국내에는 2017년 처음으로 '회덜린 시 전집'이 번역 출간됐다.
횔덜린이 15세에 처음으로 쓴 '사은의 시'부터 1843년 6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쓴 '전망'에 이르기까지 그가 생전에 지은 모든 시와 메모들을 담았다.
영국 시인 제라드 홉킨스(1844~1889)의 시 역시 교황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홉킨스의 시는 아주 독창적인 것으로 '도약률(sprung rhythm)'이라는 운율법을 이용하거나 두운(頭韻)을 많이 써서 이미지와 암유(暗喩)의 복잡한 구성을 시도하는 등 의미의 강력한 집중을 표현해 주목을 받았다.
생전에는 시를 한 편도 발표하지 않았으나 그의 친구 브리지스가 홉킨스의 시 수 편을 모아 한 사화집(詞華集)에 발표한 이후 1918년 '홉킨스 시집'(1930 증보판)을 간행했다.
1875년 겨울 독일에서 추방된 수녀 5명이 템스강 하구에서 난파해 익사한 사건을 읊은 '도이칠란트호의 난파'(The Wreck of the Deutschland)는 가장 유명한 그의 대표작이다. 불의의 고통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묘사하고 다섯 수녀의 죽음을 '예수 오상(五傷)'에 비유했다. 당시에는 대담한 상상이었다.
입추가 지나고 장마와 폭염이 주춤하는 사이 본격 휴가철과 방학을 맞았다. 현대인의 삶에 깊은 영감과 위로를 전하는 메마른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책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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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김민수 기자 maxpress@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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