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 문인 다뤘다고 불온문서 낙인…원판 지형마저 압수 [책&생각]

한겨레 2024. 8. 9. 05: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의 첫 책 │ 문학평론가 권영민
권영민 교수.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내가 쓴 첫 번째 책은 1983년 7월 문예출판사에서 발간한 ‘한국 근대문학과 시대정신’이다. 서울대학교에 부임한 후에 서둘러 출간한 이 책은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기에 관한 새로운 자료의 해석 문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해방 공간 문단의 좌우 분열과 문인들의 이념 선택에 따른 월북 문제를 최초로 다룬 내용도 함께 포함했다. 그런데 이 책은 보안사령부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여 일반에게 공개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악명 높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독재 상황을 견뎌야 했다. 검열 당국은 이 책을 사상적 불온 문서라는 낙인을 찍은 뒤 인쇄한 책 2천 부와 함께 원판 지형마저 압수했다. 그리고 출판사 사장이 어딘가로 끌려가 보름이 넘도록 혹독한 추궁을 당했다. 나는 이런 사실을 통보받은 후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언제 나도 끌려갈지 겁에 질려 공포에 떨고 있었다.

불안·공포 속 하버드대 방문연구
덕분에 세계문학 접할 계기 돼

하버드서 월북 문인 자료 정리
대대적인 해금 조처에 물꼬 터

나는 두어 차례 부총장실의 호출로 책의 저술 경위를 설명하는 경위서를 작성 제출했고 내가 대학원 시절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했던 이기영 ‘서화’ ‘고향’, 임화 ‘문학의 논리’ ‘현해탄’, 정지용 ‘정지용시집’ ‘산문’, 김기림 ‘시론’, 박태원 ‘천변풍경’, 김남천 ‘대하’, 박세영 ‘산제비’, 설정식 ‘포도’, 오장환 ‘성벽’, 이찬 ‘대망’ 등과 조선문학가동맹 편 ‘건설기의 조선문학’ 등을 모두 압수당했다. 그리고 학과장실에도 불려갔다. 학과장은 시국의 상황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대로 넘어갈 것 같지 않다는 부총장의 걱정도 전하면서 학과에서도 조심스럽게 이 문제를 처리할 방안을 찾아보고 있다고 했다. 학과장은 우리 대학을 방문한 미국 하버드대학 마셜 필 박사에게 나를 하버드대학에서 초청하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 뒤 나는 마셜 필 박사의 추천과 동아시아어문화과의 한국사 담당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님의 도움으로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 방문연구자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1985년 5월10일 문제가 터졌다. 이날 신문들은 일제히 사상 불온으로 당국에서 압수한 서적 목록을 발표했다. 그동안 정부 당국이 조사해온 이념 서적 233종과 불온 유인물 73종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압수 수색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들 서적에 대해서는 사정 당국의 엄격한 조사를 통해 법적 조치를 취할 것임을 예고하기도 했다. 이 서적 목록에 나의 책 ‘한국 근대문학과 시대정신’이 포함되었다. 나는 조바심을 치면서 우여곡절 끝에 출국수속을 끝내고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 근대문학과 시대정신’은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혀 보안사로부터 압수된 후 그 실체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책은 나를 미국으로 내몰았고 내가 세계문학의 넓은 무대를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1986년 여름 나는 일년 동안의 하버드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내 책의 행방을 묻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아시안 게임과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민주화의 물결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특히 올림픽 직전 한국 정부는 이념의 개방 조치를 추진하게 되었다. 나는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에서 틈틈이 정리해 둔 북한 문학 관련 사항과 함께 1945년부터 1950년 사이의 월북 문인 120여 명에 관한 자료를 모두 정리하여 당시 정한모 문공부 장관실로 전했다. 한국 정부는 반공법으로 묶어 이적행위자로 지목했던 월북 문인의 모든 작품에 대한 일반 공개를 결정하는 대대적인 해금 조치를 서울 올림픽 직전 발표했다. 한국 현대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 셈이었다. 금서가 되어버린 ‘한국 근대문학과 시대정신’은 그 후 출판사의 사정으로 복간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내용을 새롭게 보완하고 학문적 관심을 확대하여 ‘한국현대문학사 1, 2’를 펴낼 수 있게 되었다.

서울대 명예교수

권영민 교수.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그리고 다음 책들

한국현대문학사 1, 2

이 책은 한국 현대문학의 전개 양상을 역사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문학 텍스트의 존재 방식과 그 시대적 의미를 밝히는 데에 주력했다 . 그리고 국어국문운동을 기반으로 새로운 문학 양식이 성립되는 과정 , 일제 강점기 현대문학의 전개 양상 , 해방을 맞아 한국문학이 세계문학 속에 새로운 위상을 확립해 가는 과정을 통합주의적 관점에서 논의하고자 했다 . 여기서 강조했던 문학사의 연속성은 문학적 사실에 대한 해석을 통해 구축되는 논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

민음사(2002년 초판, 2020년 개정증보판)

한국계급문학운동연구

나는 이 책에서 일제 강점기 계급문학운동이 민족사회운동과 어떠한 조직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주목하면서 그 사회 문화적 확대 과정을 역사적으로 체계화하고자 하였다 . 계급문학운동은 카프의 결성과 함께 조직적으로 확대되었으며 계급의식의 추구와 함께 그 대중적 실천을 선도하였다 . 이 책에서는 계급문학운동을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운동의 범주 안에서 새롭게 검토하고 그 역사적 성격을 재조명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14)

이상 연구

이 책은 ‘이상 전집’ (2009) 에 뒤이어 내가 관심을 두었던 이상 문학 연구의 총결산에 해당한다 . 나는 이 책에서 텍스트의 정밀한 분석과 통합적 해석을 통해 기존 연구에 드러난 원전의 불확정성과 작품 해석의 자의성 등을 제거하고자 노력했다 . 특히 이상의 삶에 관한 과장 왜곡된 설명을 바로잡고 그의 행적과 문학적 실천 과정을 정밀하게 조사 정리함으로써 비평적 전기로서 이상 읽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고자 했다 .

민음사(2019)

한국현대문학비평사

이 책에서 나는 한국 현대문학의 비평적 성과를 실증적으로 확인하고 이를 통합적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 그리고 문학비평의 다양한 개념과 문학을 보는 기본적인 관점과 태도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서술함으로써 한국문학 사상사를 포괄할 수 있는 비평사를 확립하고자 했다. 특히 한국적 특수성에 기반하여 확립된 문학관과 외래적 비평 방법론의 통합과정에서 한국문학의 특수성과 보편성의 문제까지 드러내고자 하였다.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24)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