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정치는 자유주의 너머에 있다” [책&생각]
현대 의회주의의 타협정치 비판
가톨릭의 권위적 정치 준거 삼아
마치니식 민족공동체 정치 제시
로마 가톨릭교와 정치적 형식
카를 슈미트 지음, 윤인로 옮김 l 두번째테제 l 1만 5000원
20세기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1888~1985)는 ‘위험한 정치사상가’의 맨 앞자리에 놓일 만한 사람이다. 슈미트의 정치사상은 ‘자유주의 정치’에 대한 단호한 비판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런 슈미트 사상의 성격이 20세기 후반 이래 자유주의 정치의 한계를 뚫고 나가려는 좌파의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했다. ‘로마 가톨릭교와 정치적 형식’ 은 슈미트의 위험한 사상이 담긴 초기 저작 가운데 하나다. 이 책에서 슈미트는 로마 가톨릭교의 정치적 특성을 준거로 삼아 자유주의 정치를 비판한다.
슈미트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독일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슈미트를 키운 그 ‘가톨릭 보수주의’가 훗날의 정치사상에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다. 법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슈미트는 서른 살 무렵부터 저술 활동을 시작해 ‘독재’(1921), ‘정치신학’(1922), ‘로마 가톨릭교와 정치적 형식’(1923), ‘정치적인 것의 개념’(1927)을 잇따라 발표해 학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슈미트가 초기 저술 활동을 하던 그 시기는 독일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극심한 혼란을 겪던 때였다. 사회민주당 당수 출신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됐으나, 바이마르 체제는 좌우익 극단주의의 위협에 끝없이 흔들렸다. 슈미트의 저작은 바로 이 시기의 허약한 바이마르 자유주의 체제를 겨냥했다.
슈미트에게 자유주의 정치는 정치 자체의 고유한 본질을 해체하는 정치다. 자유주의 정치는 산업자본주의 체제의 산물로서 산업의 합리적 관리가 목표인 정치,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정치라고 할 수 없는 정치다. 슈미트는 비슷한 시기에 쓴 다른 저작(‘정치신학’)에서 자유주의를 ‘모든 문제, 심지어 형이상학적 진리까지도 토론과 협상으로 해소하려는 사고방식’이라고 비판하고, 자유주의 정치를 “결정적 대결, 피비린내 나는 결전”을 의회의 토론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끝없이 대화만 하는 정치라고 공박한다. 슈미트는 의회주의의 이런 ‘어정쩡함’에 ‘결단주의’를 맞세운다. 이 책의 출발점에도 정치에 대한 슈미트의 이런 생각이 놓여 있다.
이 책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와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산업자본주의의 쌍생아로 보는 슈미트의 관점이다. “현대 산업 경영자의 세계상과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세계상은 마치 쌍둥이 형제처럼 닮았다.” 둘 다 모든 것을 경제적 사고에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똑같은 지반을 공유한다. 슈미트는 러시아 혁명을 이끈 레닌의 1920년 연설의 한 구절을 거론한다. “공산주의란 소비에트 권력에다 국도 전체의 전력공급을 더한 것이다.” ‘전력공급의 방법과 관련해 누가 옳은지’를 두고서만 다툰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세계의 자본가들이나 공산주의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나 다를 것이 없다. 미국의 금융가도 러시아의 볼셰비키도 “경제적 사고를 위한 투쟁”에서만큼은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 두 세력의 경제주의적 발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정치의 고유한 영역은 없다’는 반정치적 사고다. 슈미트는 이런 생각에 단호히 반대한다. 경제적‧기술적 사고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정치적인 것’이 따로 존재한다. 그런 사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슈미트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든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내가 너희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노동자는 “우리가 너희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맞받는다. 이런 ‘중대한 사회적 대립’은 경제적 차원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대립은 단순히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싸움’이 아니라 경제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도덕적 신념의 파토스로부터 생겨나는 대립’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풀려면 정치를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슈미트는 ‘의회주의의 대리’와 ‘가톨릭교의 대표’를 마주 세운다. 의회주의는 ‘투표하는 개인’을 단순히 대리하는 이들을 뽑는 데 머문다. 의회는 대리자들의 모임이다. 반면에 “가톨릭교는 시종일관 ‘위로부터’ 대표한다.” 다시 말해 가톨릭교회는 “다스리고 지배하며 승리하는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의회는 익명성의 지배 아래 인격 없는 세력을 대신할 뿐이지만, 가톨릭교는 교황이라는 분명한 인격적 권위를 통해서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 그리스도의 지배를 드러낸다.
슈미트는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특성을 한 번 더 거론한다. 가톨릭교회는 추기경단이라는 귀족제 요소와 추기경단이 선출한 교황의 지배라는 ‘전제 군주제’ 요소를 동시에 지녔다. 더 나아가 교황은 출신이 미천한 사람 중에서도 뽑힐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제적 성격도 지녔다. 이 세 가지 성격의 통합 속에서 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 조직체로서 가톨릭 세계를 다스린다. 가톨릭교회는 인간 공동체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된 신으로서 그리스도 자신을 인격적으로 대표한다.” 그런 대표야말로 경제적‧기술적 사고를 넘어서는 교회의 우월성을 보여준다. 슈미트는 가톨릭교회와 산업자본주의가 합일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는 ‘이해관계자 연합’이 아니라 도덕적 이상 아래 통일된 ‘정치적 국가’를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슈미트가 보기에 가톨릭의 이런 정치 형식은 결코 사라질 수 없으며 현대 국가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구현되지 않을 수 없다. 특이한 것은 러시아 공산주의가 그 가능성의 영역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러시아 공산주의는 경제적 사고로 정치를 해소하려고 하지만 정치의 본질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결국 “경제적 기반 위에 새로이 확립된 권력으로부터 새로운 종류의 정치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슈미트가 러시아 공산주의의 미래에 판돈을 거는 것은 아니다. 슈미트는 19세기 이탈리아 혁명가 주세페 마치니가 제시했던 ‘도덕적인 의무로 뭉친 민족공동체’의 이념을 구현하는 ‘서유럽 문명’ 쪽에 선다.
요컨대 자유주의의 허약한 타협정치를 폐기하고 권위의 지배 아래 도덕적 공동체를 실현할 정치가 독일에서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슈미트가 나치 집권 초기에 히틀러 독재를 지지한 것도 이런 기대의 결과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는 환멸로 끝나고, 슈미트는 ‘나치 이념에 충실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히틀러 체제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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