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학의 ‘굴기’…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었나[책&생각]
청-조 ‘조공’ 아닌 ‘종번체제’ 주장
베트남·오키나와도 ‘조선모델’ 따라
근대 국제질서 해석…시진핑에도 영향
조선은 청 제국에 무엇이었나
1616-1911 한중 관계와 조선 모델
왕위안충 지음, 손성욱 옮김 l 너머북스 l 2만9000원
청나라 하면, 어떤 이는 인조의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을, 혹자는 영화 ‘마지막 황제’의 푸이, 즉 선통제를 언급한다. 그런가 하면 병자호란을 다룬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이 세간의 인기를 얻었는데, 여전히 ‘청나라=오랑캐’라는 인식도 강하다. 무엇을 생각하든, 명에서 청으로 사대와 조공 대상이 바뀐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 델라웨어대학교 역사학과 왕위안충 교수는 ‘조선은 청제국에 무엇이었나’에서 조선과 청의 관계가 조공이 아닌 “종번”(宗藩)에 기반했고, 그 체제를 가능케 한 것은 “조선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의 종번체제는 “정치-문화적 구조”로서 이미 서주시대(기원전 1046~기원전 771)에 성립되었다. 종, 즉 중국 군주는 “‘천명(天命)’의 대리인으로서 절대적인 가부장적 권위와 독점적 정통성을 가지고 ‘중국’에 거처하는 ‘천자(天子)’”를 말한다. 번은 “중국 변경에 전초기지를 세운 왕실 일족”으로, 종의 보호 아래 천하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른바 ‘사대’와 ‘자소’라는 상호작용 속에서 종번체제는 지속되었다.
지은이는 청나라가 종번체제를 적극 수용했다고 주장한다. 1637년 초 조선을 정복한 청이 “명의 가부장적 지위를 대신하여 조선과 종번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애초부터 명과의 “부자관계이자 군신관계”를 인정했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해주자” 명에 더욱 매달렸다. 그런 조선이 오랑캐라 여긴 청과 종번체제를 맺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이 대목에서 조선 모델이 언급된다. 지은이에 따르면, 1637년 삼전도의 굴욕 직후 “청-조선 종번관계”가 수립되었다. 청은 “스스로를 재정의하고 중화세계를 재편하려는 거대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청은 조선 모델을 따라 다른 국가나 정치체가 “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청의 연호와 역법을 채택하며, 청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조공하면서 청 중심의 종번체제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청제국은 조선, 안남(베트남), 유구(오키나와) 등은 물론 18세기 말에 이르러는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도 “‘오랑캐의 나라’로 규정하고 중국의 주변부에 위치”시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청의 조선 모델 구상은 허술하지 않았다. 1627년 후금은 거침없이 조선을 유린했다. 강화도로 피신한 왕은 후금을 형의 나라로 모시기로 “맹약”했다. 후금은 “정치적·이념적으로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조선은 여진 정권을 “최고 통치자가 있는 나라로 공식 인정”했고, 지정학적 영역에서 “여진 정권의 정치적 정통성 강화에 일조”했다. 후금과 조선 준종번 질서가 형성된 것이다.
1637년 청은 형의 나라에서 아버지의 나라로 그 지위를 바꾸었다. “종번 구조 안에서 중국과 주변 국가들의 정체성은 상호 의존적인 필수 구성 요소”인데, 청은 “정치·문화적 영역 안에 있는 유교 국가인 조선으로부터 정치적 정통성”을 얻어냈다. 조선이 “청이 중화세계에서 자신의 중심성을 정당화하는 데 절실히 필요했던 정치·문화적 토대”를 제공한 셈이다.
한편 1644년 명 멸망 이후 조선은 “자신을 중화문명의 유일한 계승자로 인식하려는 노력을 강화”했다. 다만 “청에 ‘중국’으로서 정치적 정통성이 있음을 명시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유교적 정통성의 계승을 강조하는 ‘소중화’ 담론을 강화”했다. 국내에서 “공자, 맹자, 주희의 계승자”를 자처한 것이다. 18세기 중반 이후 청에 다녀온 홍대용, 박제가, 채제공, 박지원 등 상류층 지식인들은 “중국에서 명을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점점 깨달았고, 이 인식은 ‘사대’라는 명분 아래 청을 섬기는 것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안남이나 유구 등 여타 번보다 사신 파견의 빈도를 높였는데, “조선은 다른 번의 모범이 될 정도의 훌륭한 방식으로 사대한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변화는 외부, 즉 서구와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청나라 집권층이나 과거시험에 합격한 대다수 관료는 “유교 중심적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런 영향으로 북경에 “‘오랑캐 사절’이 상주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중화와 이민족을 나누는 화이지변(華夷之辨)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프랑스가 1866년 조선이 가톨릭 신자를 박해하고 프랑스 신부 9명을 처형한 병인양요에 항의하며 조선을 침략했다. 청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주장과 “조선은 모든 정사를 스스로 다루는 자주국이므로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동시에 펼쳤지만, 프랑스 등 서구 여러 나라는 이해하지 못했다. 지은이는 이를 “이 주장은 종번 용어로 명확했지만 서양 공사들에게는 모호하고 역설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한다. 청은 서구 여러 나라에 “상대방이 이해하는 용어로 중국의 속국으로서의 지위”, 즉 종번체계를 설명할 수 없었다. 미국 역시 “조선은 실질적인 독립 국가”로, 조선의 중국 조공은 “정부 차원의 조공이라기보다 중국인들과 무역하는 특권에 대한 대가를 보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종번체제의 균열은 19세기 후반 미얀마를 영국에, 유구를 일본에, 베트남을 프랑스에 잃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은 종번체제의 종언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1895년 4월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과 자치”를 명시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청은 “동쪽 울타리” 조선을 상실한다. 1911년 신해혁명 전후 청나라는 사라졌고, 기원전부터 중국이 주변 나라를 통치하던 방식인 종번체제 역시 끝나버렸다.
‘조선은 청제국에 무엇이었나’의 주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통념과 사뭇 다르다. 다름이 불편함을, 다시 말하면 우리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반감을 부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조선과 청이라는 미시적 관점을 통해 당대 동아시아의 역사를 세밀하게 살핀다는 점에서 ‘조선은 청제국에 무엇이었나’는 눈여겨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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