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어른’은 가출을 허락하지 않는다 [책&생각]

임인택 기자 2024. 8. 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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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소설 확장해 온 하명희 신작
‘죽음으로의 여행’ 내딛는
서정 서사 중심 8편 소설집
‘좋은 어른’ 부재한 과거로의 여행
2009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한 하명희 작가가 신작 소설집 ‘밤 그네’를 펴냈다. 교유서가 제공

밤 그네
하명희 지음 l 교유서가 l 1만6800원

한여름 아침 8시께 읽다 눈물을 흘리고 만 단편의 제목은 ‘먼 곳으로 보내는’이다. 50대 여성 넷이 주인공이다. 서울 동부 한 동네서 자라고 한 초등학교에서 만난데다 이름이 진숙, 연숙, 선숙, 미숙이니 단짝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진숙, 연숙은 어려 한 교회를 다니며 특히 더 가까웠고, 5, 6학년 때 선숙, 미숙이 차례로 전학 왔다. 불리길 ‘숙자매’는 ‘사숙이’라 놀림받아도 ‘진선미’에 연을 넣은 ‘진연선미’로 맞받고,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관계는 여문다. 형편도, 부모도 변변치들 않았으니, ‘숙들’의 결연은 서로의 궁색을 내보이고, 엿보는 일이다. 소설엔 없는 이야기이나, 그러고서 소녀들은 여자가 되며 저마다 신고의 삶을 살아냈으리라.

“네 남편에게 문자가 왔어”로 시작하는 소설 속 화자는 미숙이다. ‘진숙이를 잘 보내고 왔습니다.’ 진숙이 가족끼리의 단출한 장례식을 바란 탓에, 나머지 숙들은 빈소와 발인도 가볼 수 없었다. 넷의 우애는 여전했고 중년 되어 요양보호사 자격을 다 같이 따자고 법석대기도 했으니, 진숙이 친구들 조문을 애초 마다한 사연까진 소설 몇 쪽을 더 거쳐야 한다. 친구들은 진숙이답게 갔다고도 했고, 지금은 슬프지 않다고도 했는데, 아무렴 그 말은 실제 기후보다 먼저 오는 절기의 용어 같은 거라, 결국 다들 넋 놓고 토로하게 된다. “도대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기집애는.”

그 시절, 진숙만 2층 양옥에서 살 뿐 죄 가난했다. 진숙도 엄마는 늙고 아빠는 늘 없었으니 외톨이이긴 마찬가지. 선숙은 일찍 아버지가 병사하고 집 나간 엄마 대신 살림을 도맡았다. 미숙은 가정폭력 아버지 포함 가족이 재규합한 게 근래다. 선숙은 13살 되도록 귀지 파본 적도 없다. 우연히 귀이개를 들이댄 미숙은 그토록 많은 귀지가 무서웠고, 돌아오는 길까지도 손끝에 밴 생선 썩은 냄새에 ‘선숙이는 나보다 더 가난하구나’ 한편 안도했다.

넷의 이야기지만 진짜 주인공은 연숙네 아버지라 해본다. 연숙이 사는 옹색한 공장 사옥에 다들 몰려갔을 때다. 장신이기도 했지만 천장이 낮아 머리 숙인 채 밥을 먹던 연숙의 아버지는 만난 적 없는 진숙, 미숙, 선숙의 이름을 다 알아 부르고, 근황을 나누는 것이다. 공장 다니는 아버지가 평소 딸과 학교 얘길 나눈다는 사실에, 앞서 목도한 부녀의 격의 없음 내지 살가움에 나머지 숙들은 차라리 기괴함을 느낀다. 연숙 아버지는 6학년 말 넷의 첫 여행을 제안한다. 모두가 첫 생리를 시작한 즈음 생일 맞은 연숙 엄마와 함께 파티도 해준다. “축하해요, 우리 딸들.” 예상되는바, 그때가 1980년대 중반이다. 이 ‘사건’은 특히 진숙을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비관하기 쉬운 여자의 삶, 부재한 줄로만 알던 좋은 어른에 대한 자각과 의지랄까.

직후 교통사고로 여생을 누워 지낸 연숙 아버지를 진숙이 25년 간호사 생활 뒤 직접 간병하겠다 나선 배경에도 벼락 같던 환대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탱시킨 데 대한 보시가 있었다. 13년 함께 살고 36년을 간병하는 연숙네 가족에게도 숨 쉴 틈을 준다. 진숙이 돌연 잠적하기 전까지 말이다. 미숙에게 연숙 아버지 큰 키에 맞춤 된 관만 미리 짜달라 부탁한 채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애가 타는 친구들에게 진숙의 가족도 함구할 뿐으로, 연숙 아버지도 떠나고 계절이 지나서야 진숙은 문자로 소식을 전해온다. “여기 한번 와줄래?” 숙들은 진숙에 성도 내지만 잠시다. 틈 없는 문자 탓이다. “내일 와. 꼭 와야 해.”

피할 수 없는 길. 진짜 아플까 두려운 마음, 시간도 주지 않고 영영 ‘잠적’할까 두려운 마음. 가다가 만난 시골 버려진 예배당, 안으로 쏟아지는 빛들의 마음. 죽음 앞둔 진숙이 제대로 이별하려고 숙들을 부른 덕에 어떤 마음들이 몰려드는 길의 풍경이 그랬다. 숙들은 울지만 가지 않을 수 없는 길. 음식과 노래가, 추억이, 드러나지 않았던 사연이 오갈 즈음 연숙은 아버지 유품에서 찾았다는 사진 한 장을 꺼낸다. 넷이 처음 간 여행 때다. 바다를 향해 있는 숙들을 그때도 연숙 아버지는 하나씩 이름 불러 사진 찍었다. 말미에 드러나는바, 교통사고 뒤의 일이었다.

하명희 작가의 새 소설집 ‘밤 그네’에 엮인 8편 단편은 70~80년대 가난의 초상을 모자이크하면서도 한 가지로 선명히 나뉜다. 어른의 행색이 그것이다. 숙들의 부모들이 둘로 나뉜 것과 같다. 가령, 동네 사람한테 ‘아픈 일’을 당한 딸을 절에 떠넘긴 어른들(‘작년에 내린 눈’), 집안 사정으로 중학생 때 내맡겨진 조카를 학대하고 조카 글까지 제 아들 글로 둔갑시켜 상을 받게 하는 고모네 어른들(‘다정의 순간’)이 있다면, 연숙의 아버지가 있고,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연상시킬 만큼- 서로 모르는 자들이 신세 졌다며 제 장례식장에 몰려들게 하는 글쟁이 어른(‘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어른과 저 어른 사이엔 ‘마산행’ 아버지가 있다. 가족에게 모질고 고지식한데다 이상하리만치 걷기 싫어하는 가부장. 언질도 없이 아버지가 비운 집은 불안하…지 않고 되레 “환하고 명랑하다.” 화자인 딸은 우연히 방송을 보다 아버지가 마산에 가 있음을 알게 된다. 40년 전 부마항쟁의 가장 어린 피해자, 즉 15살 나이로 시위에 참여했다 40여일 감금 고문당한 이로 소개되는 출연자가 다름 아닌 제 아버지라니.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2019년 10월이 소설의 배경일 것이다. 폭력적 어른에게 주는 면죄부라기보다, 환대가 없던 시대, 국가가 (가장 극악한) 어른이었던 시대에 대한 소환장에 가깝다.

‘밤 그네’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가출과 여행의 은유적 길항이다. 여러 작품에서 가출은 결핍이고 저항, 분열이다. 가족여행 한 번 해보지 못한 처지로 진짜 가난은 구체화(‘먼 곳에 보내는’)한다. ‘마산행’에선 1주일 집을 비운 아버지조차 딸에겐 가출로 간주된다. 40년 전 아버지의 여행과 유사한 가출처럼 말이다. 반면 여행은 충만이고 화해, 통합이 된다. 고모네에서 입은 언니의 오랜 상처가 난생처음 자매와 딸들의 여행으로 보듬어지듯(‘다정의 순간’), 과거사를 알고 아버지를 만나러 아내와 딸이 먼저 마산행 기차에 오른 것이 여행이듯, 여행은 곧 가출이라고만 여겼던 숙들이 좋은 어른을 만나 여행의 참뜻을 비로소 맛본 것처럼 말이다.

여행은 ‘돌아온다’는 점에서, 더 많은 작품이 죽음 특히 장례를 형상화하는 까닭이 짐작된다. ‘작년에 내린 눈’은 요양병원에서 숨을 멈춘 날로부터 발인 전날까지의 며칠을 배경 삼는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기억과 기억되지 않는 기억까지 ‘몰려드는’ 터, 죽음으로의 여행은 곧 과거로의 여행이다. 그 여행길, 예가 필요한 이유는 좋은 어른을 기억해내고, 또 만나길 염원하는 때문이리라.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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