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태·화려한 문장 ‘괜찮아’…전문가의 자아도취 ‘지식의 저주’ [책&생각]

최재봉 기자 2024. 8. 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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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핑커(하버드대 교수)는 '빈 서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같은 책들로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저술가다.

이 두 책이 심리학과 인지과학 분야에 속하는지라, 그가 '글쓰기의 감각'이라는 작법서를 쓴 것이 다소 생뚱맞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다른 사례이지만, "체질량 지수는 음식 섭취에 대해 증가 함수를 취한다"는 식의 전문가용 문장은 "음식을 더 많이 먹을수록 살이 더 많이 찐다"는 평이한 문장으로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한다는 것이 핑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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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핑커의 글쓰기 안내서
원칙주의에 맞서 실용적 조언
“수동태, 화려한 문장도 괜찮다”
사실 확인, 논증 검토 등 강조
게티이미지뱅크

글쓰기의 감각
21세기 지성인들을 위한 영어 글쓰기의 정석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l 사이언스북스 l 3만원

스티븐 핑커(하버드대 교수)는 ‘빈 서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같은 책들로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저술가다. 이 두 책이 심리학과 인지과학 분야에 속하는지라, 그가 ‘글쓰기의 감각’이라는 작법서를 쓴 것이 다소 생뚱맞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미국 언어학회 정회원이자 ‘아메리칸 헤리티지 영어 사전’의 어법 패널 의장을 맡은 언어 전문가이기도 하다. 저술가로서 명쾌하며 유려한 글쓰기의 모범을 보인 바 있는 그가 글쓰기 안내서를 낸 것이 이상할 일은 없는 것이다.

부제에 ‘영어 글쓰기’라는 표현이 나오고 책 내용 중에는 영어 단어의 뉘앙스 차이나 문법 구조에 관한 설명도 들어 있지만, 큰 틀에서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일반적인 안내서로 읽을 수 있다. 핑커는 특히 기존 글쓰기 지침서들의 완고하고 원칙주의적인 규정에 딴지를 걸며 변화하는 언어 질서에 맞는 실용적인 조언을 건넨다. 수동태를 삼가라든가 간소하고 격식 있는 문체를 유지하라는 등의 지침에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수동태가 지닌 장점이 분명히 있으며, 화려하면서도 명료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의 첫 장에서 핑커는 잘 쓴 글들을 사례로 제시하며 글쓰기의 감각을 설명하고자 한다. “좋은 글을 음미하는 것은 무턱대고 어떤 규칙들을 따르는 것보다 작가의 감각을 키우는 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처음 소개되는 글은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책 ‘무지개를 풀며’의 도입부.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행운아들이다”라는 첫 문장은 “클리셰로 시작하지 않고” “강하게 시작한다”는 점에서 좋은 글의 표본과도 같다. “망연자실한 확률의 맹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머쥐게 된 삶이라는 행운에 대한 감탄과 감사의 글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뒤집어놓는다”는 점에서도 역시 좋은 글의 요건을 충족시킨다.

스티븐 핑커. 위키미디어 코먼스

핑커는 이어서 철학자 겸 소설가 리베카 뉴버거 골드스타인의 ‘스피노자 배신하기’, 마걸릿 폭스의 부고 기사, 이저벨 윌커슨의 논픽션 ‘다른 태양들의 온기’ 등을 예로 들며 좋은 글의 특징을 설명한다. “낯익은 어휘와 추상적 요약보다 참신한 단어와 구체적 이미지를 선호한다는 점, (…) 단순한 명사와 동사를 바탕에 깔되 간간이 특이한 단어나 관용구를 적절히 배치한다는 점, (…) 상황을 세세히 알리는 묘사를 보여줌으로써 노골적인 설명문을 늘어놓을 필요를 사전에 없앤다는 점” 등이 그 특징들이다.

좋은 글의 반대편에는 나쁜 글도 있다. 저명한 역사학자 존 키건의 대표작 ‘세계 전쟁사’를 예로 들며 핑커는 부정이 많이 담긴 문장, 균형과 비례의 부족, 테마의 일관성 부족 등을 문제로 지적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모든 문제가 “전문가의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키건이 ‘지식의 저주’에 붙들려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글쓰기를 한다는 것. 다른 사례이지만, “체질량 지수는 음식 섭취에 대해 증가 함수를 취한다”는 식의 전문가용 문장은 “음식을 더 많이 먹을수록 살이 더 많이 찐다”는 평이한 문장으로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한다는 것이 핑커의 주장이다. 그는 힘주어 말한다. “지식의 저주는 거의 부패, 질병, 엔트로피에 맞먹는 수준의 악이다.”

핑커는 사실 확인, 논증 검토, 부분적 경험과 보편적 상태의 구분, 거짓 이분법 경계 등을 좋은 글의 요건으로 강조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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