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도 영어로… 만해는 고통 딛고 살아가는 법 일깨웠다
“서정주 선생은 알츠하이머로 고생하던 사모님 대신 장 보고, 와이프 돌보고, 집안일 다 하고, 참 대단했지. 구상 선생은 항상 웃었어요. 천상병 시인은 직접 못 만났고, 1993년 4월 28일 돌아가신 지 1~2주 후에 (천 시인 아내가 운영하던) 찻집 ’귀천’에서 사모님을 만나 이후로 친해졌지요. 정호승 시인은 저랑 생일이 같아서 매년 만나요.”
올해 만해문예대상을 받는 안선재(82·본명 앤서니 그레이엄 티그) 수사(修士) 입에서는 한국 현대문학 주요 인사들 이름이 술술 나왔다. 서울 마포구 서강대 인근 그가 번역실로 사용하는 오피스텔 벽에는 김지하·유안진·장사익 등 문화 예술인들이 선물한 글씨와 그림 등이 즐비했다.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의 친필 ‘禪茶(선다)’ 족자도 걸려 있었다.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교유의 깊이와 폭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그는 “역사가 있는 작가를 좋아한다. 그래서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생존 작가 작품을 주로 번역했다”고 말했다.
안 수사는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문학을 영어로 번역해 세계에 알려온 선구자다. 지난 35년간 그가 번역한 작품은 시집 60권과 소설 등 70여 권에 이른다. 최근에는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을 번역 출간했다.
1942년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에 ‘60학번’으로 입학했다. 장학금과 생활비까지 받으며 9년간 중세 문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은 그의 선택은 뜻밖에 ‘수도자’였다. 1969년 프랑스의 초교파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테제 공동체에 수도자로 입회했다. 프랑스를 거쳐 필리핀 빈민가에서 활동하던 그를 한국으로 이끈 이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 1980년 한국에 온 그는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로 2007년 정년 퇴임했다. 그 사이 1994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한국 교수 생활은 그에게 옥스퍼드를 떠나며 내려놓았던 문학 연구를 다시 잇는 계기였고, ‘교수 월급’은 서울 화곡동 테제 공동체 4명의 생활비에 보탰다.
영문학을 가르치던 그가 한국 문학 번역을 시작한 것은 “한국 현대시가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세계에 알려지고 존경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는 “옛날 사전 펼쳐놓고 한 마디씩 번역해 타이프라이터로 쳤다”고 했다. 인터넷·이메일도 없던 시절, 그는 영미권 출판사들에 일일이 편지를 보냈다. 잡지에 실린 출판사 광고를 보고 보낸 구상 시집 ‘초토의 시(Wasteland poems)’ 원고가 1990년 영국 포레스트북스에서 출간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김광규, 고은, 서정주, 신경림, 천상병, 도종환, 정호승 등의 시집과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등 소설을 번역해 출간했다. 번역을 마치고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작품집도 10여 권에 이른다. 그의 홈페이지(http://anthony.sogang.ac.kr/)엔 번역 인생이 모두 기록돼 있다.
그는 “번역은 나에게는 취미이면서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했다. 교수, 번역가, 수도자 중에서 ‘수도자’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한다는 그에게 번역은 문화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수도 생활이었던 셈이다.
그의 번역 목록 중에는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The Silence of the Beloved)’도 있다. 2016년 펴낸 20세기 초반 한국 명시인 15인 선집에 포함된 것. 1990년대 백담사를 방문해 만해의 발자취를 느끼며 하룻밤 묵기도 했다는 그는 “만해 선생은 침묵과 언어로 동시대 사람들에게 고통스럽고 불행한 시대에 진정한 삶의 방식을 찾도록 영감을 준 분”이라며 “만해대상을 받게 돼 큰 영광”이라고 말했다.
“영국 떠난 지 55년, 프랑스 떠난 지도 거의 50년. 나는 한국인으로서 죽을 때까지 번역할 것”이라는 그는 시상식에 앞서 보내온 수상 소감의 마지막을 애송 시 천상병의 ‘귀천’을 인용해 이렇게 마무리했다. “많은 시를 통해 여행하며 많은 시인을 만났고, 시인처럼 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뒤돌아보며 이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웠다’고.”
올해 만해대상 시상식은 12일 오후 2시 강원 인제읍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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