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사양, 십팔번, 택배, 기라성... 모든 일본식 용어를 꼭 순화해야 하나?

유석재 기자 2024. 8. 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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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성규

MZ세대인 지면 편집자에게 혹시 ‘노견(路肩)’이란 말을 아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예전엔 흔히 쓰던 말이었죠. 고속도로나 자동차 전용 도로에서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폭 바깥의 가장자리 길을 말합니다.

‘노견’이라 부르던 당시엔 도로가 꽉 막히면 도로교통법 같은 건 무시한 채 이곳으로 시원하게 달리던 차들이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위급한 차량이 지나가거나 고장 난 차량을 임시로 세워 놓기 위한 공간입니다.

이것이 일본식 표현이라고 해서 ‘갓길’로 바꾸자는 순화 운동이 일어났고, ‘길이 아닌데 왜 길이라고 하는 거냐’며 ‘길섶’으로 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만, 결국 ‘갓길’이 승리했습니다. 이제 ‘노견’이란 말을 쓰는 용례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자꾸 쓰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1988년 7·7 선언 이후 ‘중공’을 ‘중국’이라 부를 때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곧 ‘중공’이란 지명이 이상하게 들리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정부 기관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이란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알고보니 ‘문화재(文化財)’란 말도 일본산 용어였다는 것입니다. 독일어 ‘Kulturgüter’를 ‘문화’와 ‘재산’이란 말을 더해 만든 용어란 것이죠.

제79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해방된 지 80년이 가까워졌지만, 과연 우리는 일본어 잔재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 것일까요? 아니, 굳이 모든 것에서 벗어날 필요는 있는 것일까요?

모두 잘 알고 계시겠습니다만, 우리말에 수용된 근대 용어들은 19세기 이후 서양 세력과 맞딱뜨린 일본이 만들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말이 상당히 많습니다.19세기 후반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본 지식인들은 ‘문명 개화’를 화두로 삼고 기존 한자어에 없는 서양 개념들을 번역한 용어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society’를 번역한 ‘사회(社會)’는 조선의 강제 개항 2년 전인 1874년 등장했습니다. ‘right’를 번역하기 위해서 ‘권리(權利)’라는 말이 만들어졌고, ‘democracy’는 ‘민본주의(民本主義)’ 또는 ‘민주주의(民主主義)’로, ‘individual’은 ‘개인(個人)’, ‘photograph’는 ‘사진(寫眞)’이란 아주 새로운 용어로 번역됐습니다.

기존에 있던 말이 번역어로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 것도 있었습니다. ‘freedom’과 ‘liberty’는 ‘자유(自由)’로 번역됐는데 ‘남에게 구애받지 않고’ ‘제멋대로’라는 뜻인 기존 용어가 근대적인 의미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라는 부사적 의미인 ‘자연(自然)’은 ‘nature’의 번역어로 ‘삼라만상’에 가까운 의미를 지니게 됐습니다.

‘republic’은 ‘공화(共和)’로 번역됐습니다. 이것은 본래 기원전 865년 즉위한 중국 주(周)나라 11대 임금 선왕(宣王)이 나이가 어려 노(魯) 주공(周公)과 연(燕) 소공(召公) 두 재상이 대신 정치를 한 것을 ‘‘공화’' 라고 한 것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사실 ‘공화’의 본래 뜻은 이처럼 두 명 이상의 소수 인원이 권력을 갖는 과두(寡頭) 정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지금 말하는 ‘공화정’과는 차이가 큽니다만, 그나마 동양 역사에서 비슷한 개념을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주소공화(周召共和)를 그린 현대의 삽화. /https://m.guoxuemeng.com/guoxue/14143.html

이 같은 용어들은 현재 우리말 속에도 자연스러운 듯 정착됐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나치게 어렵거나 우리와 정서가 다른 용어들이 번번이 순화 대상으로 지목돼 왔다는 것입니다.

바뀐 예도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빈번하게 쓰이던 ‘망년회(忘年會)’가 ‘송년회(送年會)’로, ‘노견’이 ‘갓길’로 바뀐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양(仕樣·설계 구조 또는 설명)’ ‘기라성(綺羅星·빛나는 별)’ ‘십팔번(十八番·단골 노래)’ ‘제전(祭典·잔치)’ ‘택배(宅配·집 배달)’ ‘견출지(見出紙·찾음표)’ 등처럼 국립국어원이 2006년 낸 ‘일본어투 용어 순화 자료집’에 실린 용어들이 여전히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문화 용어 중 일본식 한자어인 줄 잘 모르고 쓰는 경우도 많습니다. ‘간담회(懇談會)’는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란 뜻이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한자를 봐도 의미를 유추하기 쉽지 않습니다. ‘낭만(浪漫)’은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나 분위기’란 뜻인데 근대 일본에서 ‘romance’ 또는 ‘romantic’과 발음이 비슷한 한자를 써서 만든 말입니다.

‘지극히 일본적’인 용어도 있습니다. 음악 용어인 ‘광시곡(狂詩曲)’은 ‘rhapsody’의 번역어인데,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자유체 한시인 광시(狂詩)에 빗대 형식적 자유로움을 표현한 말이라 우리 입장에선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합니다. ‘잊지 않도록 적은 글’이란 뜻의 ‘각서(覺書)’는 일본에선 ‘깨달을 각(覺)’자에 ‘기억하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용어지만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잘 쓰지 않던 말입니다.

법률용어 일본식 한자어, 순화된 표현 정리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민법의 비문(非文)’을 쓴 김세중 전 국립국어원 공공언어지원단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더라도 이미 우리말이 된 말을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어식 해석이 아니면 뜻이 통하지 않거나 정서를 알기 어려운 용어들은 골라낼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겁니다. 우리는 이미 ‘사양’이란 말의 어감과 느낌과 그것이 현실에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전자기기의 사양’ 대신 ‘이 전자기기의 설계 구조’ ‘이 전자기기의 설명’이라고 쓴다면 모든 게 괜찮은 걸까요? 이미 오래도록 써 온 ‘기라성’과 ‘택배’를 각각 ‘빛나는 별’ ‘집 배달’로 쓴다면 정치정의인 걸까요?

원래 일본어 단어에서 온 말과 순화어, 그리고 한자어와 순우리말은 이미 변환해 버리면 의미와 정서가 달라지는 고유의 어감이 존재하게 됐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혈통’이라고 썼을 때와 ‘핏줄’이라고 썼을 때 의미가 달라지고, ‘크로켓’과 ‘고로케’의 정서가 차이를 빚는 것처럼 말입니다. 분명 순화할 필요가 있는 단어는 존재합니다만, 결코 억지로 모든 것을 ‘순화’하려 하는 것도 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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