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의 도시의 정원사] 목재가 살아 숨 쉬는 ‘K가든’의 매력

박원순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국립세종수목원 전시원실장 2024. 8. 8.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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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완도군 보길도에 있는 부용동 정원의 세연정(위)과 나무로 만든 놀이공원인 독일의 케틀러 호프. /일러스트=백형선

무더위는 수목원도 피해 갈 수 없다. 하지만 사방이 트여 바람이 통하는 전통 정원의 정자에 기대어 앉아 고즈넉한 연못에 분홍빛으로 곱게 핀 연꽃을 감상하면 잠시나마 더위와 근심을 잊고 예스러운 단꿈에 젖어볼 수 있다.

정자의 기둥과 기둥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파노라마 액자 속 연작 그림처럼 사방이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어디선가 꽃향기까지 전해져 오는 이 공간의 매력을 과연 아이맥스나 4D 영화관이 따라갈 수 있을까.

우리 정원의 매력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지혜에서 온다. 한국 정원의 맛과 멋은 오직 그 장소에서 경험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다. 보길도 부용동 정원의 세연정, 강진의 다산초당이나 백운동 원림 등 손꼽히는 우리나라 전통 정원을 직접 가보았을 때 가슴에 다가오는 느낌을 사진이나 영상에 오롯이 담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좋은 정원에서 받은 느낌은 단순한 기억이 아닌 특별한 감동으로 저장된다. 500년 역사를 지닌 담양 소쇄원에 가본 사람은 ‘소쇄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맑고 깨끗한 바람이 가슴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정원의 매력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한국 정원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우리 정원은 관물찰리(觀物察理), 즉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고 마음을 넘어 이치로 읽어야 하는 정원이기에, 겉으로만 화려한 정원과는 깊이와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우리 정원을 만들 때 중요한 재료들은 돌과 물, 나무처럼 자연에 가까운 것들이다.

특히 이렇게 자연과 하나 되는 체험의 중심에는 정자와 누각을 비롯한 목재 건축물이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숲의 숨결과 향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목재는 정원의 공간 속에 잘 스며들어 친밀한 느낌으로 시각적, 심리적 편안함을 주는 최고의 재료다.

살아 있는 나무와, 생을 다한 나무(목재)가 공존하는 공간은 우리 옛 정원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마치 죽은 고인들의 넋을 기리듯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오랜 정자와 누각의 곁을 지킨다. 그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고 사랑스럽다.

또한 살아생전 품고 있던 나무의 그윽한 향은 목재가 되어서도 마치 삶과 죽음을 잇는 정령의 숨결처럼 은은하게 주변을 감돈다. 이런 공간에서라면 좋은 시와 글도 절로 써질 것이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정약용의 ‘백운첩’,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은 모두 좋은 정원에서 영감을 받은 선비들의 명작이다.

선조들의 지혜를 빌려 현대의 도시 정원사들도 삶에 대한 특별한 영감과 철학을 얻기 위해 정원 안에 좋은 목재를 더 많이 사용할 필요가 있다. 울타리와 정자, 의자와 탁자, 올림 화단, 덩굴식물이 타고 자랄 수 있는 격자 시렁이나 아치, 그리고 정원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와 공예품들도 얼마든지 목재를 이용해 창의적으로 만들 수 있다.

특히 숲속 나무집이나 요정의 집은 아이들의 모험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최고의 장소다. 동력을 사용하지 않는 숲속 놀이공원으로 유명한 독일의 케틀러 호프(Ketteler Hof)는 클라이밍 타워, 슬라이드 등 온통 목재로 만든 신나는 놀이 시설들로 유명하다. 덴마크의 예술가 토마스 담보(Dambo)가 보여줬듯 폐목재를 재활용해 거대한 업사이클링 조형물을 만들 수도 있다. 그가 만든 북유럽 신화 속 거인 ‘트롤’은 마치 영혼을 지닌 듯 아이들에게 숲과 나무, 정원의 가치를 전한다.

나무에는 오랜 세월 흡수된 탄소가 빼곡히 들어차 있기 때문에 목재를 재사용하는 일은 탄소 중립에도 크게 기여한다. 정원의 조형물이나 시설물뿐 아니라 일반 건물을 지을 때 목재를 많이 사용하면 탄소 중립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탄소 중립 실현을 위해 2020년부터 새롭게 짓는 공공 건물은 법적으로 50% 이상 목재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번 프랑스 파리 올림픽에서도 아쿠아틱 센터와 선수촌 등 건물을 목재로 지어 지속 가능한 건축에 대한 세계적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또한 선수촌에 사용된 목재들은 올림픽이 끝난 후 사회 복지 주택을 짓는 데 재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우리나라도 산림청 산하 공공기관의 건축물을 중심으로 이 같은 흐름을 따르고 있다. 올가을 대전광역시에 개원 예정인 산림복지종합교육센터는 1만㎡ 면적에 올림픽 수영장 절반 정도 부피에 이르는 1363㎥의 국산 목재를 사용해 국내에서 가장 높은 7층짜리 목조 건축물을 선보인다. 1249t의 탄소 저장 효과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화재와 지진에도 잘 견디는 스마트 건설 공법이 적용됐다. 나무가 생명을 가진 개체로서 생을 다한 후에도 우리 곁에 다른 쓸모 있는 존재로 재탄생하여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 친화적인 삶을 실천하며 좋은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셸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나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는지 잘 알고 있다. 생태 순환을 고려한 지속 가능한 숲 관리를 통해 건강한 숲 생태계를 유지하면서 좋은 목재를 생산하고 잘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산림 경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나무는 우리의 정원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나무를 통해 세대와 세대에 걸쳐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K팝과 K컬처, K푸드 등 전 세계적으로 거세게 일고 있는 한류 열풍 속에 한국인의 정서와 지혜가 담긴 ‘K가든’이 또 하나의 매력적인 한류 콘텐츠로서 주목을 받게 된다면, 그 중심에는 우리 고유의 나무들을 아끼고 잘 활용한 선조들의 지혜가 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 광풍각./박원순 제공
전남 완도군 보길도에 있는 부용동 정원의 세연정./박원순 제공
국립세종수목원_하랑각./박원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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