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77] 조선은행권의 수수께끼 노인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유통된 엔화 화폐를 조선은행권이라고 한다. 조선은행권 앞면에는 정자관을 쓰고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인쇄되어 있다. 초기 100엔권을 제외한 모든 조선은행권에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화폐 속 인물은 대개 누구나 잘 아는 유명인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속칭 ‘수노인(壽老人)’이라는 이 인물의 정체는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다.
조폐공사 화폐박물관에는 김윤식이라는 설명이 있으나, 발행 당시 생존 인물을 화폐 인물로 선정했을 리는 없다는 반론이 있다. 일본 역사서에 등장하는 다케우치노 스쿠네라는 설도 있다. 고대 한반도 출병에 공을 세웠다는 인물로 일본 지폐에도 등장한다는 점이 근거다. 그러나 수노인과 일본 지폐 속 인물은 동일인으로 보기에는 외모가 너무 다르다.
널리 지지를 받는 설은 ‘가상 인물설’이다. 돈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물건이다. 조선인이 중시하는 경로사상과 장수 기원을 반영한 가공 노인을 그려 넣어 외세 통치에 대한 민족 저항감을 무마하려 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대만은행권에는 아예 등장인물이 없고, 만주국 중앙은행권에는 공자가 그려져 있다. 다들 피지배 지역의 반감을 사지 않으려는 유화(宥和)용 지폐 도안인 셈이다.
얼마 전 일본의 신(新)만엔권 인물인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한반도 경제 침탈의 주역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웃 나라 화폐 인물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 정작 한국 화폐는 조선 시대 인물 일색이다. 마땅한 현대 인물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해 왕조시대 인물만 등장하는 공화국 화폐가 한국은행권이다. 화폐 인물이 꼭 정치적 인물일 필요는 없다. 시야를 돌리면 주시경 선생, 우장춘 박사 등 한국인의 삶을 널리 이롭게 한 위인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나라 전체에 새로운 변화와 활력이 필요한 시점을 맞아 나라의 정체성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화폐 인물을 진지하게 모색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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