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이런 여름날의 산보
아주아주 오래전 시골 큰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지낸 적이 있다. 저물 무렵 큰아버지와 함께 논에서 피를 뽑고 있으면 지게에 꼴을 지고 지나던 구장이 한마디 했다. 매동어른, 여름 해가 참 기네요. 그러면 농으로 받아넘기는 말씀. 이 사람아, 해는 늘 동글동글하다네!
큰아버지 둥근 해 뒤로 숨으시고 나는 고향을 떠나 파주에 산다. 지게 대신 겨우 모니터나 끌어안고 뒹굴다 보면 여전히 여름 해는 참 길다. 이런 날은 사무실이 텅 비기 무섭게 심학산으로 간다. 그리 높진 않지만 깔딱 고개가 있어 한 바가지의 땀을 쏟아야 한다.
산은 도립한 포물선이다. 산에 오른다는 건 일정한 기울기로 그 포물선에 접근하는 것. 등산화 뒤축이 일직선이 아니라 말발굽처럼 비스듬히 닳는 건 지구에 부대낀다는 고달픈 증거일까. 나뭇잎이나 열매, 산의 능선, 구름의 난해한 곡선과 수학적 궁합을 맞추며 나도 이 우주의 엄연한 일원이라는 갸륵한 표시일까.
시원했다. 심학산 정상에서 겨드랑이를 벌려 온몸에 바람을 통과시켰다. 통쾌했다. 저무는 해를 보내고 떠오르는 달도 바라보았다. 그 누구에게 보고나 허락 따윈 없이 그저 내 눈으로 직방 바라보면 저의 전부를 온통 다 보여주는 저 거대한 천체의 궤도. 내려오는 길에 무슨 기척이 있어 뒤돌아보면 익어가는 도토리가 올가을에 떨어져 내리겠다 연습하는 소리. 그걸 믿고 바라보는 나뭇잎들의 열렬한 응원.
나를 배출한 길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 분명히 있던 곳에서 내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면서 이런 궁리도 해본다. 이미 오래전 담 쌓았지만 그래도 수학의 아름다움을 한 방울이나마 맛볼 수 있다면! 눈앞의 모든 사물이 자연이 던진 기호이자 언어일진대 그걸 해독하는 방편은 수학 아니고는 안 된다는 것도 대강은 알겠다. 숫자는 수의 표면일 뿐, 사물들 안에 흩어져 숨어 있다는 것도 늦은 나이에 뒤늦게 깨닫는다.
거의 내려왔는가. 어느새 컴컴한 어둠이 몰려오고 고마운 시 한 편이 떠올라 보통의 둔한 머리를 씻겨주는 저녁. “어떤 늙은이가 내 뒤를 바짝 달라붙는다/ 돌아보니 조막만한 다 으그러진 내 그림자다// 늦여름 지는 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뒤에서 받쳐주고 있다”(‘산보길’, 김춘수)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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