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어둠 속에서 실패가 빛날 때
어둠 속에서 새벽이 오는 것을 보았다
어둠이 어떻게 물러나는가를 찬찬히 보았다
유리창이 내 얼굴을 꽉 붙들고 있었다
내 눈에 비치는 내 눈
세숫대야에 담그고 있는 것처럼
어둠 속에 얼굴을 담그고 있었다
어둠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더니
서서히 얼굴을 풀어 놓아 주었다
돌아서서 검은 얼굴을 씻는다
묻어나지 않는 어둠, 손바닥으로 훑으니
산새 울음 하나 따라 나오고
아무리 뚫어져라 보고 있어도 훨훨
그가 물러나는 처음을 볼 수는 없었다
-시,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 임혜주 시집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
덥다.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니 올해가 우리 생애 가장 시원한 여름이겠다. 이상한 일이 늘 벌어진다. 모가 한창 기세 좋게 자라야 하는데 뽑아도 뽑아도 논에선 풀이 사라지지 않는다. 평생 벼농사를 지어온 농부도 모르는 풀이 벼 옆에 자란다. 나도 옥수수 때문에 애를 먹었다. 잎이 자랄 때는 폭우로 밭에 못 들어가고, 열매를 맺을 땐 땡볕이 이어져 이천알쯤 심은 옥수수 농사가 반쯤 실패했다.
친환경 우렁농법을 하는 농부는 일하지 않는 우렁이 때문에 죽겠단다. 풀을 베어먹으며 벼와 공생하는 우렁이가 굶은 채 짝짓기에만 열중이란다. 찜통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우렁이가 2세라도 빨리 남기고 죽겠다는 거다. 벌이 줄어들어 수분을 안 해주니 복숭아도 사과도 띄엄띄엄 열린다. 농사까지 이러니 서민들은 어떻게 먹고사나. 대파 875원 파동과 1만원 사과 파동이 절로 떠오른다.
공정은 언감생심 최소한의 상식도 없는 자들이 높은 자리에서 호령하는 어둠의 나라에서, “실패가 내 운명일 수는 있어도, 내 조국의 실패는 될 수 없으리라”던 보재 이상설 선생을 생각한다. 나라의 실패가 나의 성공인 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죽어가는 나라를 위해 울고, 두드려맞는 집구석들을 위해 울고, 몸 둘 곳조차 없는 목숨들을 위해 울다 간 사람을. 취업과 사업에 실패하고 관계에 실패하며 망해가는 나라에서, “실패가 나의 운명”이라던 실패의 아이콘을.
이상설은 근대 수학과 자연과학의 선구자였다. 독학으로 수학 교과서 수리를 펴내고, 한국 최초 화학 교과서와 고전물리학 원고도 써냈다. 일찍이 율곡을 이어갈 문재로 인정받고 6개 국어를 구사했으나 수학자의 길도 대학자의 길도 가지 못했다. 실패는 그의 운명, 갑오년에 마지막 과거에 합격했으나 나라가 망해버렸다. 나라를 팔아먹는 을사늑약을 저지하려 했으나 일본군에 가로막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목놓아 울었다. 종로 거리에서 국권회복 시위를 주동하고 표석에 머리를 박아 자결하려 했으나, 주변에서 시민들이 뜯어말리는 바람에 맘대로 죽지도 못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실패한 사람. 일본과 맞서 싸우자는 상소투쟁을 다섯 차례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들 이위종과 함께 이준과 만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갔으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 간도에 서전서숙을 세웠으나 일제가 간판을 떼어 버렸고, 연해주에 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를 결성하고 신문을 만들었으나, 러시아가 강제로 해산시켜 버렸다. 그는 목숨을 다해 실패한 사람. 시베리아와 만주와 미주를 넘나들며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상하이와 베이징을 오가며 신한혁명당을 건설했으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병들었다. “…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유언에 따라 장작불 속으로 들어가 우수리스크 수이픈강에 한 줌 재로 뿌려졌다.
눈 위에 눈이 내리듯 쌓여가는 실패의 공화국처럼, 가도 가도 언 땅일 때 당신의 실패는 우리의 실패다.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실패도 없다는 듯, 어둠 속에서 당신은 “검은 얼굴을 씻는다”. 실패의 반대는 성공이 아니라는 듯, 무엇도 하지 않으면 좌절도 없다는 듯, 당신은 “어둠 속에서 새벽”을 잡아당긴다. “물러나는 처음을 볼 수는 없”는 어둠의 꼬리를.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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