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마복림전
“고추장 비밀은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 1996년 한 고추장 회사의 광고 영상에서 이 한마디를 뱉으며 단박에 유명해진 마복림은 192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열아홉에 목포로 시집갔던 마복림은 1945년 이후 서울로 이주한다. 마복림 부부가 정착한 신당동은 서울 동부 교통의 요지이자 팔도의 이주민이 모여든 ‘변두리’였다. 도심과 부심으로 일 나갔다 돌아오기 좋은 동네였다.
마복림은 남편과 함께 보따리장사 등을 하다 떡볶이 좌판을 낸다. 동화극장 앞이었다. 동화극장은 1932년 개관한 극장 신부좌(新富座)가 이름만 바꾸어 다시 연 지역 명물 영화관이었다. 그때의 동화극장 앞이 오늘날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다. 여기서 신당동사거리는 지척이다. 신당동사거리는 광희문사거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이어진다. 광희문사거리는 한때 중앙시장보다 흥성했던 시구문시장(광희문시장)의 시작점이었다. 서울 을지로 6가에서 신당동사거리에 이르는 구간이 노점과 좌판과 행상으로 빽빽할 때다. 동화극장은 그 분주한 데서 한 걸음 비켜난 데 자리했다. 오락과 휴식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들기에는 도리어 마침맞았다. 마복림은 어려운 시절 목 좋은 데서 장사를 시작한 셈이다.
마복림은 1953년 어느 날 지인의 결혼 피로연에 갔다가 먹던 흰떡을 짜장면 그릇에 빠뜨린다. 그런데 짜장면 양념 묻은 떡은 맛있었다. 마복림은 우연히 포착한 그 맛을 놓치지 않았다. 황교익 칼럼니스트의 설명에 따르면 “고추장의 맵고 칼칼한 맛과 춘장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어우러”져 대중이 좋아할 만한 새로운 양념이 태어났다. 춘장의 달콤함과 짭짤함 도 다채롭고 맛난 풍미를 더했을 테다.
1978년 동화극장 앞 개천의 복개 공사가 시작돼 더 이상 길거리 장사를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마복림은 살던 집을 개조해 떡볶이 가게를 열었다. 아울러 그즈음 보급된 프로판가스 화구로 즉석에서 떡볶이를 끓여 먹는 ‘신당동 떡볶이’ ‘즉석 떡볶이’ 또한 시도했고, 인기를 얻게 되었다.
마복림은 그 뒤로도 일평생 떡볶이를 만들고 팔다 2011년 12월13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향년 91세. 어려운 시대에 한 분야를 이룬 고인에게는 상인, 요리사, 컨설턴트 등의 면모가 있다. 시대의 추이에 올라탔다면 가게를 넘는 산업을 일으켜 세웠을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한국인은 고인을 오로지 ‘할머니’로 부른다. 기록도 별로 없다. 그나마 <서울을 먹다>(황교익·정은숙) 속에 귀한 해제가 있어 고인과 함께 떡볶이 연대기의 편린이나마 돌아본다. 고인이 ‘현대 떡볶이의 발명자’는 아니다.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 고인은 조선 말기의 일품요리였던 떡볶이가 막 길거리로 나와 대중의 음식으로 바뀔 때에, 여느 서민 여성처럼 떡볶이 좌판을 시작한 이다. 서민에게 떡볶이를 팔아 생계를 이어간 이다. 그러면서 현대 떡볶이에 새로운 미각 관능을 더하고, 떡볶이 운용의 또 다른 방식을 더한 이다. 이쯤의 의미 부여가 온당하다. 더는 지나치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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