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북·일 합작 범죄

정우상 기자 2024. 8. 8.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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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12월16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에 보도된 '재일동포 귀국실현 60주년 기념보고회'. 이날 행사는 1959년 재일교포 975명이 일본 니가타항을 출발해 청진항으로 향하면서 시작된 북송 사업이 60주년을 찬양하기 위해 열렸다./노동신문 뉴스1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17세 재일 교포 소녀는 1960년 4월, 니가타에서 청진으로 향하는 북송선에 홀로 올랐다. “북한은 지상낙원, 공짜로 공부할 수 있다”는 조총련 교사들의 말에 북송을 결심했다. 아버지 만류는 귀에 안 들어왔다. 일본에서 차별 속에 사느니 ‘평등하고 발전한’ 북한에서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일러스트=이철원

▶청진에 도착한 소녀는 수천 명의 환영 인파에 가슴이 떨렸다. 배가 항구로 접근하자 1년 먼저 북한에 온 선배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는 부두에서 일본말로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절규하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배가 항구에 닿고 환영 인파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행색은 거지 떼였다. 북한 실상을 알게 된 소녀는 두 달 만에 자살하려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1년 뒤 북한에서 합류하기로 한 가족들을 말려야 했다. 먼저 자살한 사람이 가마니에 싸여 버려지는 것을 보고 죽음은 접었다. 북한은 자살한 재일 교포를 반역자로 몰았다. 그녀는 2003년 탈북했다. 지옥 같은 시절이 몸서리쳐져 북한 이름을 지우고 가와사키 에이코라는 일본 이름으로 살고 있다.

1971년 5월 재일교포를 태우고 북한으로 갈 선박이 일본 니가타항에 정박해 있는 모습. 북·일 양측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000여명의 재일교포를 북송했다./조선일보 DB

▶일제 패망 이후 일본 좌파들은 북한을 ‘이상 사회’로 칭송했다. 일본 언론들은 재일 교포 북송에 대해 호의적 기사들을 쏟아냈다. 요미우리, 아사히신문의 당시 1면 제목은 “귀환선, 희망을 싣고 니가타에서 청진으로 출발”이었다. 도쿄대 운동권이었던 오가와 하루히사 현 도쿄대 명예교수도 당시 사회주의를 위해 북송을 택했던 조선인들에게 감동받았다고 한다. 그는 북송의 참상을 알게 된 이후 지금까지 북한 인권 운동을 하며 속죄하고 있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340명이 북송선에 올랐다. 이 반인륜 범죄의 공범은 북한과 일본이다. 북한은 김일성 체제를 선전하고 부족한 노동력을 위해 북송 사업이 필요했다. 재일 조선인들을 멸시하고 차별했던 일본 정부와 사회에 조선인 북송은 바라던 바였다. 북한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국교가 없던 북한과 일본을 대신해 양측 적십자사가 협정을 체결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인도주의로 포장됐다.

▶과거사위원회가 재일 교포 북송 사건을 북한과 조총련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공식 규정했다. 과거사위는 “1차 책임은 북한과 조총련에 있다. 당시 일본 정부와 일본 적십자사는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사업을 지속시켜 인권침해를 용인했다”고 했다. 김씨 왕조의 죄악에 입을 다물고 있는 한국 운동권은 과거사위의 이번 발표에 대해 뭐라 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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