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재원의 정치평설] 한동훈의 ‘슬기로운 여당 대표 생활’을 위한 고언
과거 한국 정치에서 집권 여당 대표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대통령 중심 권력구조에서 거의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말이 곧 ‘법’이었던 권위주의 시대엔 정말 그랬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엔 사정이 다소 달라졌다. ‘하기 나름’에 따라 정치적 권위와 결과가 오락가락했다. 1990년 3당 합당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이명박 정부 마지막 1년 여당을 책임졌던 박근혜. 대표직을 바탕으로 대권을 거머쥐었다.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정반대였다. 대표 자리가 사실상 ‘정치적 무덤’이 돼 버렸다. 한때 차기 대선주자 1위를 달렸던 새누리당 김무성. 2016년 총선 때 청와대와의 충돌로 ‘옥쇄 파동’을 거쳐 패장이 됐다. 그렇게 대권 꿈도 날아가 버렸다. ‘노무현의 경선 기적’을 함께 일궈 열린우리당 의장직을 꿰찼던 정동영. ‘졸렬한 전략’이라며 신당 추진을 비판한 당시 노 대통령 말 한마디로 무너졌다.
그렇다고 대통령과 찰떡궁합을 보인다 해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문재인 정부 초대 총리를 거쳐 민주당 대표로 총선 압승까지 견인했던 이낙연. 오히려 정권과의 차별화를 기치로 내건 이재명에게 대선 티켓을 내줘야 했다. 그만큼 절대권력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이 힘들다는 얘기다.
이 어려운 숙제를 국민의힘 대표 한동훈이 자청했다. “지금 시기 당 대표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죽기 딱 좋은 위험하기만 한 자리다.” 지난 전당대회 출사표의 한 대목이다. 말 대로라면 죽을 각오로 대표직을 맡은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배신자 프레임에서 김건희 여사 문자 ‘읽씹’ 논란, 총선 고의 패배 의혹, 인성 공격까지. 친윤(친윤석열)계의 파상 공세를 버텨냈다. 무엇보다 당심과 민심이 그의 도전을 지지했다. “보수정치를 혁신적으로 재건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하겠다.” 한동훈의 ‘다짐’을 한번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1차 투표 62.8% 득표율로 결선투표 없이 간단히 승리했다.
그가 대표에 취임한 지도 어느덧 보름여. 그토록 공언했던 ‘폭풍 같은 변화’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나름대론 열심히 쫓아다녔다. 대통령과의 독대, 친윤계 정책위의장 경질, 중진들과의 식사 정치, 민생정책 제안 등. 그러나 솔직히 격화소양(隔靴搔癢)의 느낌이다. 핵심은 빼놓은 채 곁가지만 건드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당장 요즘 국회 돌아가는 모양새만 봐도 그렇다. 거대 야당은 총선 민심을 내세워 이른바 개혁 입법 속도전을 펼친다. 기다렸다는 듯 대통령은 거부권으로 맞선다. 여당은 숙명마냥 똘똘 뭉쳐 재의결을 막는다. 뿔난 야당은 더 독해진 내용으로 법안을 재추진한다. 와중에 여야는 거친 몸싸움과 막말을 주고받으며 사사건건 충돌한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억장이 무너질 판이다. 벌써 22대 국회가 시작된 지도 두 달여. 쳇바퀴 정쟁으로 단 하나의 법안도 가결, 공포되지 못했다. 동물적 극한투쟁에 멈춰버린 식물국회. 여기에 한동훈은 없다. 국회의원 아닌 원외 대표라서 ‘나 몰라라’ 했을까. 그보다는 ‘대통령의 심기, 용산 눈치 보느라’가 정답일 것이다.
어쩌면 ‘야당 음모론’ 탓이라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적잖은 여권 관계자는 민주당 입법 독주를 대통령 거부권 남발 유도 전략으로 보고 있다. 종국에는 조기 탄핵으로 몰고 갈 것으로 본다. 전혀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다. 한창 진행 중인 민주당 전당대회. 최고위원 후보 다수가 “윤석열 탄핵”을 외치고 있다. 그렇다고 한동훈의 ‘실종’이 설명되지 않는다. 108석의 원내 제 2당, 여기다 국정을 책임진 집권 여당의 대표다. 야당 계략이 빤히 보여도 앞장서 부딪쳐야 한다. “구태의연한 정치적 도식의 장벽을 깨부수겠다.” 대표 도전 때 호기롭게 내뱉었던 말을 실천할 때다.
물론 평가할 대목도 분명 있다. 지난 7일 민주당이 제안한 대통령과의 ‘일 대 일’ 회담. 용산은 대통령 휴가를 핑계로 즉답을 피했다. 그런데 한동훈이 바로 나서 ‘오케이’ 사인을 날렸다. 누가 봐도 여당 대표를 패싱해 대통령과 직거래하려는 야당의 속셈. 한 마디로 ‘윤-한 틈새 벌리기’로도 볼만 하다. 그래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여야가) 정책 협의하는 건 좋은 일이다. 절차나 격식은 차후에 따져도 되지 않겠나.”
여당 대표로서의 정치적 득점을 손해 봐도 좋다는 것일까. 진심이라면 좀 더 과감하게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입법 독주와 거부권이 충돌하는 ‘치킨게임’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야당이 아니라 대통령과 여당부터 설득해야 한다. 집권 세력이 대화의 문을 열고, 먼저 대안을 제시하는 게 순리다. ‘정치하는 대통령’ ‘협치하는 여당’. 반드시 이끌어 내야 한다. 전당대회 때 약속했던 ‘채상병 특검법’, 논란이 됐던 ‘여사님 직접 사과’. 꼭 관철해야 한다. 이 정도도 못하면 그토록 외쳤던 ‘공공선’은 공염불이다. ‘있으나 마나’한 여당 대표는 시간문제다. 좀 더 독하게 말하면, 아예 정치를 접어야 한다.
차기 대선 출마를 생각한다면 기껏 1년 여의 당 대표 생활. 대통령도, 친윤도, 친한도 의식말라. 오직 민심 하나만 보고 가라. 한동훈의 ‘슬기로운 여당 대표 생활’을 위한 유일한 지침이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