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은행은 특수한가? [윤석헌 칼럼]
윤석헌 | 전 금융감독원장
근래 은행 관련 다수 기사가 부정적이다. 첫째, 은행의 점포와 자동화기기 수가 빠르게 줄고 있다는 소식은, 비용 절감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은행 쪽 변명에도 불구하고 고령층 고객의 불만을 자아낸다. 둘째, 최근 시중금리 상승세가 주춤하면서 저축은행 파킹통장 금리가 일부 시중은행 파킹통장 금리보다 낮아져 저축은행 경쟁력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보도는 국내 금융제도에서 은행의 과도한 점유율 우위를 지적하는 셈이다. 셋째, 올해 상반기 홍콩에이치(H)지수 하락으로 홍콩 주가연계증권(ELS) 투자자 손실이 큰 폭으로 발생하여 상반기 중 금융감독원 분쟁조정 건수가 대폭 증가했고 일부는 소송에 들어갔다. 그 뒤 한동안 지수 상승으로 소강상태를 보였던 투자자 손실 문제가 8월 들어 미국발 경기침체 우려 속에 시장이 급등락하면서 악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수수료 수익 창출을 위해 고객에게 불완전판매를 마다하지 않았던 은행의 신뢰에 부정적 영향이 불가피하다. 넷째, 우리은행, 국민은행, 경남은행 등으로 이어지는 은행 내부 금융사고는 고객 피해와 직접 연관되지 않았지만, 블랙박스화되는 은행 모습에 우려가 커진다.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를 지낸 코리건(1982)은 ‘은행은 특수한가?’라는 볼커 전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면서 세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은행은 지급결제시스템의 기반을 형성하는 요구불예금 서비스를 제공한다. 둘째, 은행은 경제활동에 필요한 유동성 공급의 통로 역할을 한다. 셋째, 은행은 신용창출 과정을 통해 통화정책 효과에 영향을 끼친다. 다만 그는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 기능 및 예금자보험 등이 은행의 이러한 기능 수행을 지원한다고 덧붙였다.
코리건의 세가지 이유는 모두 은행의 특수성이 정부가 부여한 제도적 특혜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은행 스스로 창출한 역량이 아니라는 뜻인데, 이 때문에 은행의 특수성이 과도한 특혜라는 견해도 있다. 더욱이 국내에서는 은행이 특별한 역할 수행이나 위험 부담 없이 제도가 보장하는 ‘천수답 경영’에 안주하여 수익을 올린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저비용 요구불예금의 독점적 취급을 기반으로 대출금리를 낮추어 선순위 주택담보대출(주담대)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안정적 수익이 보장되어 영업 규모 확대에 전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근래 경제의 디지털 전환과 규제 완화가 경쟁을 부추기면서 이러한 특수성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첫째, 최근 제2금융권의 파킹통장과 비대면 입출금통장은 각각 금리와 편의성 면에서 은행 요구불예금 기반 침탈에 도전하고 있다. 특히 파킹통장은 입출금이 어느 정도 자유롭고 은행 요구불예금보다 고금리를 제공한다. 단, 은행과 저축은행의 일반 파킹통장은 예금보험 대상이나 증권사 현금관리계좌(CMA)는 예금보험 대상은 아니다. 이들이 각각 은행 요구불예금의 경쟁재로 부상하면서 은행의 자금 조달 우위가 흔들릴 수 있는데, 은행이 스스로 파킹통장을 개설하거나 예금금리를 높여 이에 대응하면 그만큼 은행의 저원가 경쟁력, 즉 특수성은 기반이 와해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자금 이체가 빛의 속도로 일어나는 디지털 전환 경제에서 와해의 속도는 계속 빨라질 것이다.
근래 업황이 악화된 저축은행이 예금 유치를 위해 파킹통장 활성화에 나서고 있다. 이는 금리 상승 때에는 은행 요구불예금보다 고금리를 지급하여 예금 유치에 효과적이고, 금리 하락 때에는, 금리가 확정된 정기예금과 달리, 금리 하향 조정이 가능하여 금리위험이 최소화된다는 장점을 지닌다. 최근 시중금리가 주춤하는 상황에서 파킹통장 경쟁력에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하지만 이런 상품 출현 이전보다 저축은행 수신 경쟁력이 강화될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둘째, 파킹통장 출현으로 은행의 요구불예금이 줄고 저축은행 예금이 늘면 경제 내 신용 창출에 변화가 예상된다. 우선, 예금 규모 변화를 주담대에 적용하면, 은행의 주담대 규모는 감소, 제2금융권 주담대 규모는 증가가 예상된다. 그러나 이는 주담대 공급자 간 점유율 변화이고 주담대 총량은 변화가 없다. 다만 은행은 주담대 취급 규모 축소로 인적·물적 가용 자원에 여유가 생길 것이므로 이를 활용하여 고부가가치 금융중개업무 확대를 기대해볼 수 있다. 다음, 동일한 대출금리를 전제로, 은행 대출이 제2금융권 대출보다 선호되는 이유 중 하나가 은행이 고객에게 제공하는 정보와 자문, 모니터링 서비스 등 특수 서비스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이 국내 은행에도 적용될지에 대한 답은 실증연구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긍정적인 답은 국내 은행의 특수성을 지지하는 것으로 문제 될 게 없지만, 부정적인 답은 국내 은행의 특수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국내 은행은 특수성 유지를 위한 방안 모색이 필요하다.
셋째, 코리건이 놓친 은행의 또 다른 특수성으로 위험관리가 있다. 은행은 고객에게 위험관리 서비스를 제공할 책임이 있고 자본금 충실화 등으로 국가경제 위험을 흡수할 책임도 있다. 특히 수출입 의존도가 높고 개방경제로 외부 위험에 상시 노출된 한국 경제에서 위험관리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어렵다. 따라서 전문적 능력을 길러 위험관리 소임을 다하는 것은 국내 은행에 요구되는 특수성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할 점은 일정한 경제활동에서 발생하는 위험은 반드시 누군가 부담해야 하며, 이를 나누어 부담할 수도 있고 관리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위험관리 전문가인 은행이 주 책임으로 위험을 부담한 뒤에 이를 관리하는 게 이를 고객이나 국가에 전가하는 것보다 바람직한 방안이 아니겠는가. 예컨대 홍콩 이엘에스 사태에서 은행이, 금융투자상품 판매를 목적으로, 고객에게 위험을 부담시키고 수수료 수익을 취했던 것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간 국내 은행은 제도가 보장한 특혜 속에 안주하면서 중개 역량 확충과 중개 서비스 제공에는 소홀했다. 따라서 이제라도 제도에 기대지 말고 내부의 인적·물적 여유 자원을 활용하여 중개 역할을 개발 및 제공함으로써 특수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시장과 고객에 관한 정보 생산, 고객에 대한 맞춤형 서비스 개발, 위험관리, 혁신벤처 자금 지원 등 고부가가치 금융 서비스 공급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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