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이후 열린 야만의 재판…이선균 유작 ‘행복의 나라’
육군 대령 박흥주.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자 중앙정보부장의 최측근이었지만 강직하고 청렴했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서울 성동구 행당동 산동네의 슬레이트집에 살았고 전재산은 400만원이었다. 10·26 사건 인물 중 유일한 군인이었기에 군사법정에서 단심제 재판을 받았다. 재판 16일만에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3월6일 총살당했다.
오는 14일 극장 개봉하는 영화 <행복의 나라>는 김재규에 가려졌던 박흥주라는 인물을 실제 재판을 통해 조망하는 작품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로 ‘천만 감독’이 된 추창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배우 조정석이 변호사를, 고 이선균이 박흥주 대령을, 유재명이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육군 소장 전두환을 연기했다. 재판 당시 변호인들의 모습을 종합해 변호사 ‘정인후’라는 캐릭터를 만들었고, 박흥주와 전두환의 이름은 각각 ‘박태주’ ‘전상두’로 바꿨다.
추창민 감독은 8일 기자와 만나 “10·26 사건이나 박흥주 대령 자체가 아니라 ‘야만의 시대’를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전상두는 권력층의 야만성을, 정인후는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정신을, 박태주는 희생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다만 영화가 박흥주라는 인물에 누가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죠. 영화가 묘사한 박흥주의 행적이나 재판 과정은 과장하면 95% 이상 실제 자료에 기반한 것입니다.”
<행복의 나라>는 특이한 법정영화다. 통상 법정영화는 피고인의 무죄와 억울함을 주장하면서 강렬한 드라마와 서스펜스를 연출한다. 하지만 <행복의 나라>는 박흥주 대령을 영웅시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 박 대령의 무죄를 주장하지도, ‘민주주의를 위한 행동’이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영화 속의 박태주는 속내가 복잡해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추창민 감독과 박흥주 대령 사이의 ‘거리두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관객을 감정적으로 설득하지 않겠다고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추 감독은 “10·26 사건 당시 박흥주 대령의 행동이 옳았는지는 아직도 물음표”라며 “제가 모르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이 관객에게 진정성을 갖고 다가가려면 재판 장면이 어느 한쪽에게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세상에 절대적인 선악은 없고 ‘49대 51’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다만 박 대령 개인이 훌륭했던 분인 건 사실입니다. 그분의 인생 전체를 오도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행복의 나라>는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왔다. 2011년 당시 제작사가 시나리오 계약을 마치고 배우 캐스팅에 나섰다. 하지만 2012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자 정치적 부담감에 제작이 엎어지고 말았다. 당시 제작사 임원들이 독립해 제작사 ‘파파스필름’과 ‘오스카10스튜디오’를 차리면서 다시 영화화가 추진됐다. 사실 지난해 ‘천만 영화’ <서울의 봄>보다 먼저 실사 촬영을 끝냈지만 이선균이 목숨을 끊으면서 ‘올 스톱’ 됐다.
추 감독은 “선균이 사건 터지고 저도 꽤 오랫동안 아무 일도 못했다”고 말했다. “다시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선균이가 눈에 많이 띄더라고요. ‘산 사람은 살려야 한다’ 같은 대사들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들진 않았으니 관객에게 그대로 보여드리고 판단받자고 생각했죠.”
많은 배우들이 실제 정치적 사건을 담은 영화에 부담을 느낀다. 제작사에 따르면 조정석은 시나리오에 반해 소속사를 설득했고, 이선균은 ‘조정석과 해보고 싶다’며 출연을 결정했다. 유재명은 처음엔 출연 제의를 거절했지만 이후 “시나리오가 계속 생각난다”며 나섰다. 세 배우 모두 호연을 보여주는데 특히 유재명은 전두환을 매우 위압적인 캐릭터로 표현했다.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을 연기한 황정민과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행복의 나라> 제작진은 박흥주 대령의 서울고 동창회를 통해 유족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유족에게선 “영화를 만드는 것은 자유다. 우리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받았다. 추 감독은 영화에 담지 않았지만 박흥주 대령은 감옥에서 두 딸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겠느냐. 자기 판단에 의해 선택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지게 되어 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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