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반전드라마 ‘레지테아터’ 최전선...잘츠부르크·브레겐츠 가보니 [리뷰]

정주원 기자(jnwn@mk.co.kr) 2024. 8. 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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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여름 오페라 페스티벌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브레겐츠
올해 8월 1~13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하우스에서 공연되는 로버트 카슨 연출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의 한 장면. 비텔리아 역 소프라노 알렉산드라 마셀러(왼쪽)와 세스토 역 메조 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 사진제공=잘츠부르크 페스벌
# 사랑에 눈먼 세스토와 권력에 눈먼 비텔리아, 두 여성이 정치적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잠깐, 세스토는 1791년 모차르트의 원작 ‘티토 황제의 자비’에선 ‘바지 역할’(남장한 여자 가수)이지만 2024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 위에선 그냥 여자다. 이들 동성 커플은 남자인 척 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진한 스킨십도 나눈다.

달라진 건 또 있다. 원작은 숙적도 품는 절대군주 티토의 덕행을 찬양했다면, 21세기형 배반의 정치 드라마엔 영원한 건 없다. 오히려 안일한 통치자가 최후를 맞고 권모술수가 승리를 거두는 결말이 쓴웃음을 유발한다. 세계적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세스토 역)와 테너 다니엘 벨(티토 역)이 그려낸 인간적 고뇌도 현실 반영 그 자체였다. 1일(현지시간) 저녁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하우스에서 공개된 첫 무대에선 원작을 비튼 반전 결말에 놀라워하는 탄식과 기립 박수가 동시에 터졌다.

8월의 보덴호(콘스탄츠호)를 배경으로 눈 덮인 마을을 구현한 필립 슈톨츨 연출 오페라 ‘마탄의 사수’ 전경. ©anja koehler
# 잘츠부르크에서 320여 km 떨어진 오스트리아 서쪽 끝, 스위스·독일과 거대한 보덴호를 공유하며 국경을 맞대고 있는 브레겐츠에선 마법의 세계가 펼쳐졌다. 19세기 베버의 낭만주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다. 현실의 이런저런 갈등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것이 악마의 손아귀에서 펼쳐지는 독특한 연출이다.

2일 오후 9시, 내리는 어둠 속에 마주한 호수 위 야외무대는 한여름 밤이란 게 믿기지 않게 눈과 얼음, 물로 뒤덮여 있었다. 불 뿜는 용과 지옥의 마차가 솟구치고 님프와 좀비가 뛰어다니는 등 흡사 서커스 쇼를 방불케 했다. 독일 전설을 반영한 원작엔 없는 풍경들이다. 원작에선 간접적으로만 등장하던 악마 자미엘이 이 작품에선 빨간 쫄쫄이를 입고 나와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해설자’ 역할을 맡았다.

세계적 오페라 축제들이 ‘레지테아터’로 현대 오페라의 가능성을 넓히는 중이다. 레지테아터는 독일어로 직역하면 ‘감독의 연극’이란 뜻. 수백 년 전 만들어진 고전 속 캐릭터를 변주하거나 시·공간을 옮겨 현실을 반영하는 연출법을 말한다. 관객에게 신선한 인상과 의외의 반전을 안긴다면 절반 이상의 성공인 셈이다. 세계 최대로 꼽히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브레겐츠 페스티벌은 올해도 새로운 시각을 더한 오페라 작품들을 잇달아 무대에 올렸다.

모차르트 마지막作 ‘티토 황제의 자비’
美의사당 폭동 묘사 정치 드라마로 해석
세계적 메조 바르톨리, 동성애 연기 소화
권력·사랑·우정 앞에 갈등하는 고뇌 그려
‘티토 황제의 자비’에서 사랑과 우정, 권력과 정의 사이에 깊이 고뇌하는 세스토 역할을 소화한 세계적 메조 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 사진제공=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티토 황제의 자비’의 최대 주역은 단연 바르톨리였다. 그는 잘츠부르크 오순절(부활절 후 50일째) 축제의 예술감독도 맡고 있는데, 2021년 5월 이 작품을 피아노 콘서트 버전으로 올린 후 이번엔 여름 축제의 전막 공연에서 직접 세스토 역할을 맡았다. 게다가 연주를 담당한 모나코 왕가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지안루카 카푸아노도 ‘바르톨리 라인’이다. 바르톨리가 해당 악단의 창립에 관여했고, 카푸아노와도 여러 차례 협업한 사이다.

그가 무대 위에서 풀어낸 음악과 연기도 ‘역시나’였다. 비텔리아를 향한 사랑, 티토와의 우정, 권력과 정의 앞에 느끼는 깊은 고뇌가 바르톨리의 숨소리에서마저 느껴졌다. 흐느낌도 노래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비텔리아와 여러 차례 키스하는 등 동성애 연기에도 거침없었다.

테너 다니엘 벨 역시 배신한 친구를 쳐내지 못하고, 숙적을 용서하고 마는 감정을 안정적인 아리아를 통해 잘 분출했다. 이밖에 세스토의 동생 세르비아 역 소프라노 멜리사 프티, 세스토의 친구이자 세르비아를 사랑하는 안니오 역 메조소프라노 안나 테르투아쉬빌리 등 모두 수준급 연기력과 가창력을 선보였다. 비텔리아 역 소프라노 알렉산드라 마셀러는 성량과 음색이 힘에 부치는 듯한 느낌을 줄 때도 있었지만, 표독스러운 연기로 관객을 몰입하게 했다.

2021년 미국 의사당 폭동 장면을 묘사한 ‘티토 황제의 자비’의 한 장면. 극중 폭도들이 의회 내에서 대통령인 티토(테너 다니엘 벨)를 공격하고 있다. 사진제공=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시공간을 현대 이탈리아 국회의사당으로 옮긴 만큼 무대엔 내내 유럽연합과 이탈리아 국기가 내걸렸다. 현실 정치의 장면도 끼어들었다. 특히 티토에 대한 암살 기도를 국회의사당을 향한 폭도들의 습격으로 묘사한 부분은 2021년 미국 의사당 폭동 장면을 연상시킨다. 연출가 로버트 카슨은 끝까지 현실적인 결말을 유지한다. 비텔리아를 용서한 티토는 또 충신 푸블리오에게 배신당해 칼에 맞는다. 쿠데타에 성공한 비텔리아가 의기양양하게 무대 위로 걸어 나오며 막은 내린다. 비텔리아를 두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탈리아 여성 총리 조르자 멜로니와 묘하게 닮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독일 낭만주의 역작 베버 ‘마탄의 사수’
한여름 호수 위 눈·얼음 덮인 환상 세계
님프·좀비 등장해 서커스 방불케한 쇼
원작의 권선징악 교훈 뒤집은 풍자도
원작에선 직접 등장하지 않는 악마 ‘사미엘’(왼쪽)과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주인공 막스가 ‘늑대 골짜기’에서 의식을 치르는 장면. 불 뿜는 용, 좀비 등 다양한 볼거리가 동원됐다. 사진제공=브레겐츠 페스티벌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마탄의 사수’는 권선징악의 동화를 비튼 문제작이다. 원작은 사냥 대회 우승을 노리는 주인공 막스가 ‘악마 사냥꾼’ 카스파르를 통해 영혼을 팔고 마법의 탄환을 받는 등 초자연적 힘, 구원과 속죄 등의 주제를 담고 있다. 이런 종교적 이야기를 시작부터 끝까지 악마의 목소리로 들려준다는 점부터 특이하다. 극 초반에 주인공 커플 막스와 아가테의 죽음 장면을 충격적으로 보여준 뒤 시간을 되돌려 이야기를 풀어간다.

물과 눈, 얼음 등과 집·나무 등 섬세한 소품이 가득한 무대는 잔혹동화 세상 같다. 특히 무대 위엔 얕게는 정강이부터 최대 수심 2.5m, 농구코트 세 개를 붙인 것보다 넓은 총면적 1400m²의 인공 호수가 조성됐다. 배우와 가수들은 물속을 첨벙첨벙 걸으며 연기해야 했다.

무릎까지 오는 물로 뒤덮인 무대에서 흔들림없이 노래한 엔헨 역 소프라노 한나 허푸르트너. 사진제공=브레겐츠 페스티벌
특히 아가테 친척인 옌헨 역할의 소프라노는 님프들이 띄운 작은 부표 위에 올라서서 고음을 지르는 등 고난도 오페라 아리아를 소화했다. 극 중 악마와의 거래가 이뤄지는 ‘늑대의 골짜기’ 장면은 좀비가 기어다니고 불쇼 효과와 늑대·까마귀 울음소리를 더해 한껏 스산하게 표현됐다. 아가테가 막스를 걱정하며 악몽을 꿀 땐 흡사 영화 ‘엑소시스트’의 한 장면처럼 침대와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은 1945년 시작한 이래 유럽의 대표 여름 축제로 자리 잡았다. 상주인구 3만 명도 안 되는 소도시에 매일 7000명, 한 달간 20만여 명의 관람객이 몰려든다. 호수 위에 각종 기술을 집약한 거대한 무대를 세우는 특성상 작품은 2년에 한 번씩 교체되며, 내년 축제까지 마탄의 사수가 올라갈 예정이다. 앞서 2019~2020년 이 무대에 리골레토를 연출했던 필립 슈톨츨이 이번에도 자기 상상력을 보덴호 위에 풀어놨다. 국내에서 실황 영상을 만날 기회도 마련됐다. 10일 오후 2시 전국 9개 메가박스 ‘클래식 소사이어티’ 상영관에서 자막과 함께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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