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넘는 한국 영화 역사’로 마음을 가득 채우다
[서울&]
1919년 ‘의리적 구토’로 한국영화 시작
1926년 ‘아리랑’ 성공에 무성영화 각광
1970년대 검열로 쇠‘ 퇴·불황 시대’ 오명
‘실미도’ 뒤 천만영화 시대…다양성 뽐내
마포구 영화박물관
잘 만든 영화를 보고 나온 마음처럼 한국영화박물관을 찾아간 날 하늘은 벅차게 맑았다. 놀러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섰다가 가슴 가득 영화의 세상을 품고 나왔다. 놀며 배우며 새로운 것을 찾던 호기심은 재미와 감동으로 쌓였다. 세계의 영화, 한국의 영화, 그리고 영화를 위해 살았던 사람들이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으로의 초대한다.
영화의 탄생, 최초로 기록된 것들
1895년 12월28일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라는 기계를 통해 프랑스 그랑 카페에서 입장료를 받고 영화를 상영한 날이 영화의 탄생일로 기록됐다. 하지만 에디슨이 1893년 발명한 키네토스코프, 시네마토그래프와 비슷한 시기 슈클라다노프스키 형제의 바이오스코프, 로버트 폴의 씨어트로그래프등 그 전에도 움직이는 영상을 촬영하고 상영하는 기계는 있었다. 다만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지 못해 ‘영화의 탄생일’ 기록을 뤼미에르 형제가 차지했다고 한다.
‘영화의 탄생’ 기록을 읽고 관람동선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서면 골목 같은 전시실 앞쪽 벽에 상영되는 영상을 볼 수 있다.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즈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부터 극동아시아까지 여행하는 계획에 따라 1901년 한국을 방문했다. 버튼홈즈는 당시 촬영한 영상을 고종 황제에게 보여줬다. 그게 황실어람(황실 영화관람)의 시작이었다. 버튼 홈즈는 1913년에도 우리나라를 촬영했다고 한다. 이 두 시기에 촬영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1910년 당시 경성 내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영화상설관이 생겼고, 1912년 우리나라 사람을 대상으로 영화를 상영하는 상설관인 우미관이 문을 열었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는 무엇일까? 전시된 안내글에 따르면 1919년 <의리적구토>가 연극에 삽입된 연쇄극(키노드라마) 형식으로 상영됐다. 1923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월하의 맹세>, 같은 해 송죽키네마주식회사가 만든 <국경>이 있었다. 순수 우리나라 자본과 우리나라 제작진이 만든 최초 영화는 1924년 김영환 감독, 김옥희•김설자 주연의 <장화홍련전>이다.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이 성공한 뒤 우리나라 무성영화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1955년 <미망인>이 개봉되면서 박남옥 감독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감독으로 기록됐다.
영화계 최초의 기록들,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국영화박물관에 전시된 전시물에서 영화계 최초의 기록들을 확인하며 점점 영화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피어난 영화의 꽃, 1980년대를 맞이하다
한국전쟁 당시 김학성 촬영감독이 기록영화를 촬영할 때 착용했던 완장, 철모, 수통, 카메라, 노출계 등이 전시실 한쪽에 전시됐다.
김학성 감독의 유품들에서 영상기록에 목숨을 걸었던 한 영화인의 뜻을 읽는다. 전쟁 이후 폐허의 도시에서도 영화는 피어났다. 1955년 <춘향전>, 1956년 서울 개봉관 관객 수 10만 이상을 기록한 <자유부인>, 1957년 최초로 아세아영화제 특별 희극상을 수상한 <시집가는 날> 등이 1959년 제작편수 100편을 넘기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에서 사용하던 프랑스 데브리(Debrie)사 파르보 35㎜ 카메라, 1973년 정창화 감독의 <흑야괴객> 촬영 당시 최호진 촬영감독이 사용했던 아리플렉스 2c35㎜ 카메라 등 한때 촬영 현장을 누볐던 카메라들이 이제는 관람객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1970년대 한국영화는 쇠퇴와 불황의 시기로 기록된다’는 문구로 시작된 1970년대 영화계 안내글 중에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영자의 전성시대> 등 눈에 띄는 몇몇 영화 제목을 발견했다. 검열에서 삭제된 <바보들의 행진> 필름, 검열대본, 검열서류, 시나리오 원고지도 전시됐다. 70년대 유명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들이 상영되는 화면 앞에 놓인 영사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1940년대 후반에 제작 된 것으로 추정하는 35㎜ 필름 영사기다. 대구의 코리아극장에서 사용했던 영사기라는 설명이 붙었다.
1980년대~1990년대 초 영화계를 설명하는 안내판 문구는 ‘변화의 바람’으로 시작됐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바람은 영화계에도 불었다. 소재의 제약이 사라졌고, 독립영화들이 물 위로 떠올랐다. 1988년 <칠수와 만수>, 1990년 <그들도 우리처럼>, 1990년 <경마장 가는 길>, 1990년 <남부군>, 1992년 <하얀전쟁>, 1990년 장산곶매의 <파업전야> 등이 그 시대를 이끌었다.
전시실 곳곳에 설치된 작은 화면을 통해 유명 영화의 인상 깊은 장면들을 볼 수 있다. <마부>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만다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고래사냥> <그들도 우리처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파업전야>…. 이미 봐서 알고 있는 응축된 영화의 감동이 짧은 장면을 통해 폭발하면서 순식간에 가슴에 퍼져 마음을 움직인다.
세계의 영화계 초창기로 떠나는 여행
<꼬방동네 사람들>의 낡은 시나리오 장면표에 남은 배창호 감독의 친필이 이 시대의 안부를 묻는 거 같았다. <파업전야> 자료집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긴 곳에서 강제규 감독의 <쉬리>,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박찬욱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등 쟁쟁한 영화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실미도>부터 시작된, 이른 바 ‘천만영화’ 시대를 언급하는 대목을 읽고 관람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 길에 놓인 터치스크린에서 ‘영화기네스’를 선택해서 화면을 열었다.
한국영화 관객동원 기록, 한국영화의 서부극인 이른바 만주웨스턴 영화,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장면 등을 읽으며 영화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 다음에 마주한 곳은 ‘초기영화로의 초대’라는 제목의 공간이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를 재현한 기계를 작동시켰다. 영상이 상영되는 짧은시간 동안 영화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그 시대 사람이 돼보았다. 영화가 최초로 유료로 상영된 장소인 프랑스 그랑 카페 인디언 살롱에 앉아있는 상상을 했다.
최초의 여성감독 알리스 기를 소개하는 안내글을 읽고 그가 만든 영화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였다. 알리스 기의 최초 연출작은 1896년 <양배추 요정>인데, 필름이 소실되어 1900년 본인이 직접 리메이크한 영상을 보았다. 유성영화 또는 뮤직비디오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포노센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촬영한 때는 1907년이었다는 설명도 있었다.
프랑스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를 만들고 영화를 제작했던 조르주 멜리에스를 소개하는 공간도 있다. 설명에 따르면 멜리에스는 연극이나 문학처럼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할 영화를 꿈꾸며 영화로 구현할 수 있는 환상적인 장면을 위해 자신이 마술쇼에서 사용하던 여러 소품과 특수효과의 시초 격인 여러 장치를 이용했다. 그가 만든 <달세계의 여행>은 최초의 공상과학영화로 알려졌다. 1912년 <극지정복>, 1902년 <릴리퓌와 거인 나라에서의 걸리버의 여행> 등 그가 만든 영상도 보았다.
한국영화 100선을 소개한 공간과 영화 <거미집>에 소개된 의상이 전시된 ‘한국영화는 지금’이라는 공간을 지나 ‘너의 얼굴 차이밍랑’이 상영되는 기획전시실을 마지막으로 영화의 세계로 떠났던 여행을 마쳤다.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간 곳에서 마음 가득 영화의 세상을 품었다.
관람시간: 오전 10시30분~오후 7시휴관일: 일·월요일. 설·추석 연휴. 창립기념일(1월18일). 근로자의 날.(기관 사정상 휴관할 때 홈페이지 공지)관람요금: 없음문의전화: 02-3153-2072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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