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까…배터리 정보 공개 의무화 놓고 업계는 ‘동상이몽’

권재현 기자 2024. 8. 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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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전 인천 서구 한 공업사에서 경찰과 소방,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벤츠 등 관계자들이 지난 1일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화재가 발생한 전기차에 대한 2차 합동 감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인천 청라 전기차 화재 사고로 ‘전기차 포비아(공포증)’가 확산하자 정부가 배터리 정보 공개 의무화 카드를 꺼내들었다. 소비자 알 권리 보장 차원에서 정보 공개를 유도하겠다는 취지이지만 업계에서는 시각이 엇갈린다.

8일 자동차·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2026년부터 전기차 제조업체들이 소비자에게 배터리 제조사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배터리 정보 공개 의무화를 추진 중이다. 중국은 2018년부터 ‘배터리 이력 추적 플랫폼’을 구축하는 등 이미 배터리 셀과 팩 제조사, 구성 성분 등의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현행법상 전기차 제조사 외에는 배터리 제조사 관련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 게다가 이번에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불이 난 벤츠 EQE 전기차에 탑재된 중국 파라시스사 배터리는 국내 조사기관의 시험·평가를 거친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내 기관의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데 따른 것으로, 배터리 안전성 검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셈이다. 국내에는 파라시스사의 배터리를 탑재한 차량이 3000여대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격적인 전기차 시대를 앞두고 배터리 정보 공개가 이미 세계적 추세인 만큼, 국내에서도 안전한 전기차 주행을 위한 법·제도 정비는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자동차 업계는 그러나 정부가 관련 제도 마련에 나선다면 “따르겠다”라면서도, 마뜩잖은 기색이 역력하다. 납품 가격 협상의 주도권이 배터리 제조사로 넘어갈 수 있어서다.

국내 한 완성차 업체 관계자는 “자동차 하나를 만드는 데 수만 개의 부품이 들어간다”며 “이런 부품들을 누가 만드는지 소비자들이 일일이 확인하고 구입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어차피 최종 책임은 제조사한테 있다”며 “배터리만 똑 떼어내 정보를 공개하라는 건 감정적으로 후련할 순 있어도 근본 대책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전기차 후발주자인 데다 한·중·일 3국이 세계 시장을 장악한 배터리 산업의 특성상 배터리 업계를 더 신경쓸 수밖에 없는 수입차 브랜드의 속내는 훨씬 복잡하다. 세계 전기차 시장은 일시적 수요 정체 여파로 중국만 독보적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중국은 올해 상반기 글로벌 전기차 인도량을 지난해 상반기보다 20% 넘게 늘리며 글로벌 전기차 시장 점유율을 60% 위로 끌어올렸다.

배터리 제조사들은 반기는 분위기다. 배터리의 품질과 성능이 부각될수록 완성차 업체가 장악한 일련의 가치사슬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반경이 커지기 때문이다.

국내 한 배터리셀 제조사 관계자는 “부품 다변화와 가격 경쟁 등이 주요 협상 전략인 완성차 업체로선 배터리 정보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면 지금보다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브랜드 인지도와 배터리 품질, 기술 경쟁력에 따라 배터리 업체 간 쏠림 현상이 가속화할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업계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정부가 오는 12일 환경부 차관 주관으로 개최하는 관계부처 긴급회의 결과를 토대로 다음달 초 내놓을 전기차 화재 종합대책의 내용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배터리 공개 정보 의무화에 머물러선 안 된다”며 “충전 시설이 대부분 지상에 있는 외국과 달리 지하 충전 시설 일색인 한국 상황에 대한 대응책 마련 위주로 정부가 더욱 현실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지하 충전 시설에서만이라도 90% 이상 충전은 불가능하게 해 과충전을 막는 등의 전기차 화재 예방대책이 가장 시급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권재현 기자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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