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원, 나영 인터뷰② “한 세대만 바뀌면, 재생산권에 대한 고민도 바뀔 것 ”[낙태죄폐지, 다음을 상상하다]

임아영 기자 2024. 8. 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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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낙태죄’는 폐지됐지만 4년이 넘도록 정부와 국회는 임신중지 시스템을 어떻게 보건의료 시스템으로 들여놓을지 논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달 초 임신 36주째에 ‘낙태 수술’을 했다는 유튜브 영상이 논란이 되자 보건복지부는 며칠 만에 살인죄 혐의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죠. 이렇게 정부가 빨리 대처할 수 있는데 임신중지 시스템에 대한 고민은 왜 더뎠을까요.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그간 정부와 국회가 무엇을 해야했는지 ‘낙태죄 폐지 이후 상상력’을 보여주기 위해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의 ‘스웨덴 연수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의 연구위원인 윤 전문의는 지난해 12월부터 두 달간 스웨덴 연수를 다녀왔는데요. 스웨덴은 80년 전부터 포괄적 성교육을 도입했고 재생산 건강을 인권의 영역에서 다루고 있는 국가입니다. 그는 임신중지가 필수 의료인 스웨덴의 제도, 클리닉 운영 사례 등을 플랫 사이트에 5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연재 취지에 대해 듣기 위해 윤 전문의와 나영 셰어 대표를 지난달 26일 인터뷰했습니다. 플랫 입주자님들을 위해 전문을 정리했습니다.

▶ 윤정원, 나영 인터뷰(1)-“재생산권, 낯설지만 전세계가 그 방향으로 가고있어”

유럽 임신중지약 사용률은 90%
30년간 거꾸로 가는 나라는 4개국 뿐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나영 대표가 지난달 26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세계보건기구(WHO)가 2022년 새로운 임신중지 가이드를 내놨다.

나영 = WHO는 이전부터 임신중지 가이드라인을 계속 업데이트해왔다. 의료인들을 위한 임상 가이드라인, 약물 임신중지 가이드라인, 법정책 가이드가 영역별로 있고, 2022년에는 그 동안의 여러 가이드를 업데이트하고 종합해서 최신 개정판을 발간한 것이다. 2018년 가이드 이후 전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을 경험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갈 수 없었던 상황에서 임신중지에 대한 제약이 더 커졌고 여성 건강, 영아 사망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지가 전면으로 드러났다. 이후 각국에서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고, 관련 연구가 많이 진행됐다.

그 결과가 2022년 가이드에도 반영됐다. WHO는 그해 임신중지에 대한 완전한 비범죄화를 강조했다. 수년 간 각국의 합법화 방식에 따른 연구와 통계를 종합해보니 주수 제한, 사유 제한, 숙려 기간, 제3자 동의 등이 모두 결과적으로 임신중지율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는 반면 건강권과 인권을 침해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정부가 처벌 중심으로 대처하면 여성과 영아, 아동의 사망률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며, 보건의료 환경을 악화시킨다는 결론을 냈다. 무엇보다, 임신 당사자 입장에서 보편적이고 포괄적으로 접근성을 확대하는 것이 이 가이드의 중요한 프레임이다. 임신 초기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이용해 스스로 진행하는 임신중지부터 수술이나 약물 등 임신중지 방법에 따라 단계별 의료기관 가이드를 상세히 정리했다. 또 청소년, 장애인, 이주민·난민, 성소수자,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 빈곤 계층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고, 각국 정부가 비차별적인 의료환경과 지원환경을 어떻게 보장해야 하는지 법, 정책 가이드도 제시하고 있다.

윤정원 = 국제적 시각으로 보면 2015년 WHO 가이드라인은 ‘안전한 임신중지(Safe abortion)’이었다. 허가 받지 않은 사람한테 약초를 받고 뜨개바늘 넣는 방식의 임신중지는 모성 사망률이 높아지니까 안전한 임신중지를 초점으로 둔 것이다. 미국의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에는 모든 나라들이 비범죄화 단계를 밟고 있는데, 최근 30년간 거꾸로 가는 나라는 미국와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폴란드 4개국 밖에 없다. 나머지 국가들은 진보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되면서 이제는 모성사망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간적인 진료를 받을 수 있는지, 여성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진료 환경은 무엇인지 논의하는 방향으로 확대되고 있다. 주수가 많아지면 위험해지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에 대한 제약을 줄여야 한다는 이야기, 소파술보다는 약물이나 흡입술이 안전하다는 이야기도 안전성에 더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인권적인 관점이 반영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임신중지약을 이용한 임신중지가 큰 변화를 가져왔다.

나영 = 그렇다. 거주지에 갈 수 있는 병원이 없거나, 법적 제약이 있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비용이 없거나, 폭력적인 상황에 있는 사람, 학교나 직장, 양육 등의 문제로 병원에 가기 어려운 사람들이 여러 차례 병원을 방문하지 않아도 약을 이용해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게 됐다.

먹는 임신중단약 미프진. 게티이미지

-유럽은 어떻게 임신중지약 사용률이 90%가 됐을까.

윤정원 =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이성을 만나면 성병에 걸리고 임신중지하면 인생이 망한다고 가르친다. 선진국 청소년들은 성교육을 통해 내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내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배운다. 피임에 대해 배우는 것 뿐 아니라 무료로 콘돔과 피임약을 처받받고, 임신중지약을 몇 주까지 먹을 수 있는지, 진료와 상담이 필요할 때는 어디에 가야 할지를 배운다. 당연히 좀 더 이른 시기에 알아차리고 진료기관을 찾아간다. 그랬을 때 약물임신중지를 선택할 가능성이 더 넓어진다. 선택권이 무엇이 있는지 배우는 것이다. 한편 의료인들도 수술보다는 약물을 처방함으로써 불필요한 의료비를 절감하고 의료자원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유산유도제를 사용한다.

나영 = 통합적으로 진전되는 과정이라는 걸 이해했으면 좋겠다. 임신중지에 대한 정보를 배우는 것은 피임에 대한 정보, 평등한 성관계에 대해 통합적으로 배우는 이해력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성교육에서 배울 수 없으니 연결고리가 없다. 월경에 대한 이해도, 피임을 어떻게 하는지, 피임에 실패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모르게 된다. 단순히 임신중지약을 도입하면 임신중지가 늘어날 거라고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다. 피임, 임신중지 등 단계별로 어떤 대응이 가능한지 정보와 관계에 대한 통합적 인식을 만들어줘야 한다.

‘위기임신’이라는 틀이 문제인 이유

-7월 보호출산제가 시행됐다. 임신중지 논의에는 눈을 감고 보호출산제를 이야기하는 흐름이 왜 문제인지 설명 부탁드린다.

나영 = 보호출산제 도입의 주 명분이 유기되거나 살해되는 아동들을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출생등록제를 시행하게 되면서 출산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여성들의 유기나 살해가 증가할 수 있다는 주장이 보호출산제 도입에 힘을 실었다. 그런데 보호출산제는 사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이미 이전부터 익명출산제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도입이 시도됐던 것이다. 익명출산제는 해외 입양인 단체들과 아동인권 단체들이 오랫동안 도입을 반대해왔다. 여러 국제인권기구에서도 베이비박스나 익명출산제는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한국 정부에 반복해서 권고해 왔다.

익명출산제는 사실상 국가가 익명의 유기를 합법화하는 것이다. 출생한 아동의 권리나 여성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누군가의 출산을 비밀로 남기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이 사실상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부계 중심주의의 민법 조항부터 청소년, 비혼모에 대한 차별과 낙인, 이주민의 취약한 거주 지위, 열악한 양육 여건,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 제약 등이 실제 출산 후 아동 유기로 이어지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다. 그 조건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다.

하지만 익명출산제에서는 그저 출산을 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이러한 근본 원인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아동은 친생부모의 정보도 알 수가 없게 되고 지자체에 등록되어 시설에 맡겨지게 될 수 있다. 이후 아동의 삶에 대해서는 정부도 아무 대책이 없다. 복지부는 보호출산제의 위기임신 상담 체계를 통해 익명출산 이전에 여러 지원을 통해 익명출산이 최후의 선택이 되게 하겠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익명 출산이 최후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걸 안다면 애초에 정부는 익명출산제를 도입하지 않고 임신중지 접근성과 양육 지원 체계부터 제대로 구축했어야 한다.

더구나 복지부가 지금처럼 임신중지를 연계할 수 있는 보건의료 시스템을 전혀 구축하지 않고 건강보험 적용조차 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상담 시스템에서 임신중지 상담이 들어와도 상담사가 당사자의 상황에 맞추어 가까운 보건의료 기관을 안내하는 일도 할 수 없다. 결국 임신중지 결정 시기만 지연되고, 당사자의 사회경제적 상황이나 양육 여건은 변화하기 어려운 조건 속에서 익명출산이 증가하게 될 것이다.

📌[플랫]“보호출산제보다 우선되야 할 건, 위기 임신 여성을 위한 지원”

-선진국에서 의료인들은 어떤 임신중지 논의를 해왔나.

윤정원 = 불법 상황에서도 처벌을 감수하면서도 임신중지 서비스를 해왔던 의사들이 있었다. 캐나다에는 헨리 모겐텔러(Henry Morgentaler)라는 의사가 있다. 평생 임신중지 수술하면서 기소당하고 구금당하기도 했다. 그가 헌법소원을 냈고 1988년 헌재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변화가 시작됐다. 미국에는 프로라이프 세력들에 의해 진료소에 폭탄테러나 총기난사 사건들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데 지금까지 11명 이상의 임신중지 제공 의료인과 여성이 사망했다. 한국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낸 분도 전주의 산부인과 의사다. 신분을 밝히지 않으시지만 이렇게 의지를 가지고 활동한 소수의 의사들이 계신다. 전세계적으로 여성의 재생산권, 임신중지권을 지지하는 의료인들의 모임으로 ‘글로벌 닥터스 포 초이스(GDC)’라는 단체가 있다. 임신중지를 지지하는 의사들의 모임인데 이곳에서 이사를 맡고 있다. 미국, 한국, 아일랜드, 콜롬비아, 케냐먀, 모잠비크 등 임신중지 서비스가 상대적으로 어려웠고, 그만큼 운동의 전략을 치열하게 고민해 온 국가들의 의사들이 중심이 돼 활동하고 있다. 그 모임을 통해 각국에서 어떤 연구들을 하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 공유한다. 세계 의사들이 연대해서 각국의 법과 제도를 진보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 생각한다.

글로벌 닥터스 포 초이스. 홈페이지 캡처

최근 이 모임에서 임신중지에 대한 건강 위험을 확대 해석하자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임신중지에 대해 보수적인 법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도 대부분 나라에서 여성의 건강이 위험하면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조항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인데, 한국에서는 임신을 유지하면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나 이 조건을 활용할 수 있었다. 아일랜드에 상징적인 케이스가 있다. 조산 위험성이 있었는데 임신중지를 거절당해서 패혈증으로 사망한 사비타(Savita Halappanavar)라는 여성의 경우다. 임신 중 자궁경부암이 진단되어 유산 후 치료가 필요했으나, 거부당해 결국 사망한 아르헨티나의 안나마리아라는 여성도 있다. 이들의 사례가 전국민적 공분을 일으키고 각각 2018년, 2020년에 법이 개정됐다. 죽지 않으면 건강 요인으로 보지 않았는데, GDC는 이런 사례들을 모아내고 법을 바꿔낸 사례, 법을 더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예시들을 공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임신을 유지하는 것이 기존의 우울증을 악화시킨다거나, 청소년이나 성폭력 피해자가 임신을 유지하는것이 그들의 신체, 정신건강을 악화시킨다는 논리를 이용해 임신중지가 가능한 상황들을 좀 더 넓혀나가려는 것이다.

의료인이 이런 노력을 할 때 법이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다. 의료인은 일선에 있는 당사자로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알려내야 한다 생각한다. 임상 현장의 고민을 통해 정책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웨덴 교수님은 약물 개발부터 고민했다. 약물 개발(미페프리스톤-미소프로스톨 조합법과 용량 연구)부터 임상적 사용에 대한 연구(조산사에 의한 처방과 의사에 의한 처방의 효과의 차이, 집에서 복용하는 ‘홈처방’과 병원에서 복용하게 하는 것의 차이 연구)들을 통해서 근거에 기반해 정책을 바꿔왔다. 우리는 난임, 암에는 돈을 쓰지만 피임과 임신중지에는 보건의료 재정도, 연구에서도 돈을 안 쓴다.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임상 경험, 연구 결과가 정책을 바꿔낼 수 있다. 의사가 증언자이자 연구자가 될수 있다 생각한다.

캐나다에서는 의사가 활동가 역할도 한다. 지역 사회의 사회복지사 등 임신중지에 관련한 모든 당사자들을 만난다. 상담원들, 사회복지사들, 보건소장 등을 모아놓고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렇게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의사들도 있다.

‘너네 나라 선진국인 줄 알았는데 왜?’

-스웨덴을 취재하며 놀랐던 순간이 있다면.

윤정원 = 2개월 간 의사보다 조산사들을 많이 만났다. 스웨덴은 모성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조산사 양성을 많이 했고 역사가 오래됐다. 이들의 역할이 점점 커지다 보니 아무 문제 없는 여성의 경우 죽을 때까지 산부인과 의사를 한 번도 만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조산사들이 자궁경부암 검진, 성매개 감염 검진·치료도 하고 산전 검사, 출산까지 맡는다. 전치태반, 난소암 같은 ‘질환’이 진단되어야 의사를 만나는 것이다. 역할 분담과 역할 이양이 잘 되어 있었고 간호사, 의사, 조산사의 직능이 평등하고 분담이 잘 되어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또 한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인상적이었다. 처음에 만나면 한류 이야기부터 한다. 2030세대, 4050세대 모두 케이팝을 좋아한다면서 환영을 많이 받았다. 방탄소년단(BTS) 음악을 틀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임신중지 이야기를 시작하면 ‘너네 나라 선진국인 줄 알았는데 왜 그러느냐’는 질문이 많았다. 남편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 말도 안 된다는 표정도 많이 봤다.

스웨덴은 80년 전부터 아동인권과 재생산권을 고민해온 국가다. 임신중지를 합법화하고 보편적·포괄적 성교육을 제공하고, 무료인 청소년 성건강 클리닉(유스클리닉)을 전국에 설치했다. 이렇게 바뀌는데도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깨닫게 된 에피소드가 있었다. 하루는 한 청소년이 혼자 진료를 보러 왔다. 한국에서는 보호자 동의 없는 경우를 상상도 못할 일이라 부모 동의가 필요하지 않느냐 물었다. 젊은 의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러다 연배가 높은 의사가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80년 전 제도의 초창기엔 부모가 찾아와서 딸 자녀의 진료 정보를 달라고 하거나 의료인에게 항의하는 일이 있었겠지만, 청소년의 비밀유지를 최우선으로 두는 원칙을 80년간 고수하다 보니, 이제는 청소년클리닉을, 성매개감염 클리닉을, 임신중지 서비스를 받아온 청소년들 세대가 부모 세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청소년 클리닉을 이용하고 임신중지 서비스를 받았던 사람들이 엄마가 되니 당연한 것이 된 것이다. 한 세대만 바뀌면 된다는 이야기라 이야기를 들은 게 안심이 됐다.

-한국에 돌아와서 무엇부터 해야겠다 결심한 게 있었는지 궁금하다.

윤정원 = 유스클리닉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가장 필요하다. 13~23세 청소년·청년에게 성교육부터 성매개 감염, 피임, 임신중지, 성정체성 등에 대해 의사·상담사·조산사가 함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23세 이하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돌아와서 한국에 유스클리닉부터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연구비를 신청한 상태고, 가능하다면 내년부터 성매개감염을 중심으로 한 청소년성건강클리닉을 시작하는것이 바람이다.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전문의(오른쪽)와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나영 대표가 지난달 26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임신중지권’ 논의가 늦은 이유

-미국은 ‘임신중지권’이 대선 의제로 오르는데 우리는 아직 멀어보인다. 선진국들에 비해 한국이 더 늦은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윤정원 = 한국과 일본의 임신중지 논의가 비슷하다. 2019년 임신중지약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은 3년 만에 들어왔고 우리는 현대약품이 2번 신청했는데 식약처에서 반려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많은 자료가 있지만 식약처에서 깐깐하게 보고 있다. 일본은 임상시험도 빨리 했다. 우리는 임상시험을 하기 위해선 의학계가 카운터 파트가 되어야하는데 지연되고 있다. 활동가들이 공공제약사를 만드는 방법, 필수의약품을 신청하는 방법 등을 고민해봤는데 여의치 않아 현대약품의 상황이 달라지길 기다리고 있다.

나영 =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성적 권리, 재생산 권리에 대한 논의가 많이 진전되지 못한 이유는 압축적 근대화를 겪으면서 발전주의 중심으로 인구 정책이 시행돼 왔기 때문이다. 개발과 발전, 인구 정책 중심의 구조가 지속되는 동안 권리의 영역이 만들어지지 못했고, 정책과 법도, 사회적 인식도 없는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됐다. 보건의료 현장은 40년 넘게 뒤쳐졌고, 청소년, 장애인,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한편에선 임신의 유지나 출산을 억압당하고,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낙태죄로 인해 처벌과 고발, 안전하지 않은 의료 환경을 감당해야 했다. 낙태죄가 폐지됐으니 이제 구체적으로 우리의 권리에 대해 고민하고 권리의 영역을 만들어가야 한다.

윤정원 = 미국에서는 임신중지 이슈로만 가지고 나랑 같은 생각을 가진 정치인을 찍겠다고 하는 유권자층이 32%라고 한다. 특히 최근의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에 임신중지를 받기가 어려워지면서, 후보자의 임신중지에 대한 견해가 투표에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만큼 자신의 이슈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이를 표심으로 보여주는 힘이 있으니 정치권이 따라간다. 우리도 선거에서도, 국정감사에서, 여론조사에서 지속적으로 이슈파이팅하고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책임을 묻는 활동들이 필요하다.

-‘셰어’는 임신중지 지원 사업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나영 = 셰어는 2020년에 ‘곁에 함께’라는 의료인과 상담자를 위한 임신중지 상담 가이드북을 만들었고, 지난해에는 대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 사이트도 만들었다. 올해는 다양한 당사자들이 자신의 상황에 맞는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연관 기관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 대상으로 ‘포괄적 임신중지 상담 지원을 위한 활동가, 상담사 기초 양성과정’을 준비 중이다. 임신중지 상담이 들어왔을 때 상담 방향을 고민하고 지원을 연계해주며 의료 정보를 알려줄 수 있는 상담사를 위한 양성 과정이다. 그리고 이주민과 난민, 청소년을 대상으로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셰어의 임신중지 상담 가이드북 ‘곁에, 함께’

-22대 국회에서 어떤 가시적인 논의를 해야할까.

나영=우선 국회가 복지부의 할 일과 국회의 할 일부터 잘 구분하길 바란다. 지금까지 입법 공백을 핑계로 복지부가 건강보험 적용 확대, 유산유도제 도입, 보건의료 체계 구축을 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와 같은 처벌-허용 기준이 아니라 명확한 보건의료 가이드와 연계 시스템, 안전한 접근성 보장 체계다. 이것은 당장 복지부가 해야 할 일이다.

국회는 형법이 아니라 실질적인 권리 보장을 위한 법의 제정과 개정에 나서야 한다. 지금까지 인구정책의 목적에 따라 활용되어 온 모자보건법의 틀을 버리고 권리 보장을 위한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을 명시하는 새로운 법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셰어는 2020년에 ‘성 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을 만들어 배포한 바 있다. 상위법인 기본법 차원에서 성교육, 월경, 피임,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 양육 등에 관한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실행, 교육, 보건의료, 노동 영역 등에서의 권리 보장 체계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모자보건법은 전부개정을 통해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 양육 등에 관한 구체적인 권리 보장 내용과 접근성 보장을 위한 지원체계를 담아야 한다. 현재의 비범죄화 상황에 맞지 않는 개별 조항들도 개정하고, 근로기준법상 유사산 휴가에 임신중지도 포함되게 하는 등 관련법에서도 권리 보장 내용을 담아야 할 것이다.

▼ 임아영 젠더데스크 겸 플랫팀장 layknt@khan.kr

[📌낙태죄폐지, 다음을 상상하다]모든 아이들이 원하는 때, 환영받으며 태어나기 위해

임아영 젠더데스크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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