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돌풍’ 속 명대사가 현실에 오버랩되는 이유[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이 문구를 기억하시나요? 2023년 1월부터 7월까지 썼던 ‘황형준의 법정모독’ 디지털콘텐츠의 서문이었습니다. 필자는 1년간 휴직을 하면서 연재를 중단했습니다. 이 기간 중 올해 1월엔 ‘법정모독’ 연재물을 보완해 단행본 ‘포스트 윤석열’(인물과 사상사)을 출간했습니다.
복직한 7월부터 용산 대통령실을 출입하게 됐고 이제 시즌2를 시작합니다. 시즌1이 ‘취재 메모’를 바탕으로 한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가 주된 형식이었다면 앞으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정치권과 법조계의 현상과 이면, 주요 플레이어들의 속내 등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
“극중 ‘서기태’의 대사는 제 진심입니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숨 막히는 오늘의 세상 다 쓸어버리고’” |
〈돌풍〉은 6월 28일 공개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특히 “그날, 대통령의 심장이 멈췄다”는 문구처럼 세상을 바꾸기 위해 대통령을 시해한 국무총리(박동호)와 이를 막아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정수진)의 대결을 그렸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정치권에서 벌어질 법한 배신과 음모 등 이전투구에 다소 극적인 요소를 덧붙이면서 정치권에 메시지를 줬다.
이 드라마는 여러모로 현 정치권을 투영했다. 검사 출신으로 정치권에 입문해 정의를 구현하려 하지만 힘에 부치자 똑같이 진흙탕을 뒹굴면서도 일관되게 세상을 바꾸려 하는 박동호(설경구 분). 그리고 투신해 몸을 던지는 그의 극적인 최후. 운동권 출신으로 세상을 깨끗하게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정치권에 입문했지만 서서히 기성정치에 물들어가며 타락한 채 나중에는 남편의 비위를 감추기 위해 권력만 추구하는 정수진(김희애 분). 인권변호사 출신 정치인이지만 아들의 비리 등으로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든 장일준. 여러 외압 속에서도 정의 구현을 위해 ‘절친’마저 수사 대상에 올린 원칙주의 검사 이장석.
이 드라마를 본 이들은 노무현, 윤석열, 한동훈, 이재명, 조국 등 현 정치권의 여러 인물과 장면을 떠올렸다고 한다. 현실 정치가 워낙 드라마 같아서 정치 드라마가 인기를 끌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많지만 〈돌풍〉의 성공은 간만에 좀 더 현실을 뛰어넘는 작품이 나온 것 아니냐는 평가를 받는다. 극 중 명대사 4개를 위주로 스토리를 풀어봤다. (스포일러 주의)
● “정치는 산수가 아닌 수학”
국무총리이던 박동호가 장일준 대통령을 시해한 뒤 정수진 경제부총리는 박동호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 것을 막기 위해 국회에서 권한대행 사퇴 결의안을 통과시키려 한다. 그 과정에 정수진이 하는 말이 이렇다.
“정치는 산수가 아니야 수학이지. 변수도 있고 상대가 모르는 미지수도 있어.” |
최근 국민의힘 전당대회 과정을 겪은 여권 내부에선 ‘자폭·자해 전당대회’ ‘분당대회’ 등 자조적인 표현이 나왔다. ‘원 팀’을 외치던 당 대표 후보들은 서로에게 고개를 돌리며 앙금을 남겼다. 서울대 법대 선후배 사이인 나경원 원희룡 한동훈 등 후보들은 패스트트랙 공소 취소 요청 등으로 자폭 논란을 일으켰고 노상방뇨 등 과한 비유로 서로 감정을 상하게 하며 얼굴을 붉혔다. 모두 예상치 못한 미지수였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국민들은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변수는 오죽 많았던가. 한동훈 대표 얼굴로 치른 총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한 대표가 전당대회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당 대표 선출과 이후 퍼포먼스가 향후 그의 대권가도에 어떤 변수가 될지 미지수다. 당내 유력 대선 후보인 오세훈 서울시장과 원희룡 후보 등과의 경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직 판가름하기 어렵다.
당 전면에 선 한 대표가 윤 대통령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도 관건이다. 영부인과 한 대표 사이에 오간 문자까지 공개되며 전당대회 국면에서 윤-한 갈등은 고조됐고 후유증은 컸다. 전당대회 직후 한 대표와 윤 대통령이 두 차례나 만나며 당정 화해 모드를 보여주고 있지만 친윤-친한 의원 갈등이 커지면서 계속 삐걱거릴 가능성이 높다.
그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길을 따라갈지, 철저하게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각을 세우다 정권 연장에 실패한 이회창 전 대표의 길을 갈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한 대표는 극 중 장일준과 결별한 박동호의 길을 걸을 것인가, 장일준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가려는 정수진의 길을 걸을 것인가.
● “거짓을 이기는 건 더 큰 거짓말”
대선 경선에 출마한 박동호는 경쟁자인 정수진의 공작으로 코인 관련 의혹에 따라 검찰 수사를 받게 되는 상황으로 몰리자 이같이 말했다.
“누명은 말 한마디로 충분하지만 무죄를 입증하는 건 천 마디 말로도 부족하다는 거. 그리고 또 하나 거짓을 이기는 건 진실이 아니야. 더 큰 거짓말이지.” |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논란 의혹을 제기한 최재영 목사를 보면 ‘함정 몰카 취재’라는 여권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함정 수사’도 적법성 논란이 있는데 정답을 정해 놓은 채 함정 몰카를 찍은 뒤 공개하는 게 정당한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최 목사는 윤 대통령 탄핵 청문회에 출석해 영부인과 여당 대표가 정부 고위직 인사를 논의했다는 의혹 등을 제기해 위증과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으로 고발됐다. 아직 진실은 저편에 있다. 하지만 거짓을 더 큰 거짓으로, 더 자극적인 의혹을 잇달아 제기하며 기존 의혹을 덮는 것 아니냐는 느낌을 준다.
김 여사의 행실도 아쉬운 건 사실이다. 실정법상 김영란법 등으로 처벌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김 여사가 디올백을 받은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를 즉각 되돌려주지 못한 게 실무자의 착오 때문이라는 주장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이에 마냥 최 목사만 비판할 수도 없다. 검찰이 불기소 결론을 내리더라도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한 도의적 책임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물론 윤 대통령은 사과를 미루다가 총선이 끝난 뒤 5월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야 뒤늦게 사과했다. 2월 KBS 특별대담에서 디올백 논란 의혹에 대해 사과 없이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고, 좀 아쉽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면서도 ‘정치 공작’이라 규정해 실기(失期)하면서 총선 결과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 “성역 없이 파헤쳐라는 말 하는 놈들이 성역”
정치권을 주무르는 대기업 관련 의혹을 파헤치다 누명을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기태 의원과 박동호, 이장석 검사 등은 모두 검사 출신의 ‘절친’이다. 친구의 유지를 지키려는 박동호는 대통령이 된 뒤 한직으로 발령이 나 있던 이장석 검사를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한다. 마치 문재인 정부에서 파격 발탁된 윤 대통령처럼….
“살아있는 권력도 엄정하게 수사해라. 성역없이 파헤쳐라. 그런 말 하는 놈들이 성역이던데?” |
여전히 현실 정치에서도 검찰과 공수처에 대한 신뢰는 낮다. 여권에선 현 정부 들어 문재인 전 대통령 가족을 둘러싼 의혹과 이재명 전 대표 관련 의혹 등에 속도를 내지 못한 검찰을 향해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 최근 김 여사 소환 방식을 둘러싸고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과 마찰을 겪은 이원석 검찰총장을 향해 “정치하려고 하나”라며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 윤 대통령도 검찰총장 시절 문재인 전 대통령의 ‘페르소나’라고 불리던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을 향한 수사를 이어가며 똑같이 정권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는 것을 여권에선 잊어버린 것일까.
반면 야권에선 김 여사와 관련된 도이치모터스 의혹 사건을 4년가량 쥐고 있다가 갑자기 조사 장소 등의 문제로 이 총장이 여권과 각을 세우게 되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중용되며 적폐청산 수사를 진두지휘했지만 ‘조국 수사’를 계기로 갈라서면서 집권한 윤 대통령. 윤 대통령과 한솥밥을 먹다 탄압을 당한 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법무부 장관으로 깜짝 발탁된 뒤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입문한 한 대표. 문재인 정부에서 친정권 검사로 분류됐다가 윤석열 정부 출범 뒤 한직을 전전하다 야당 국회의원이 된 법조인.
모두 사법의 정치화가 정치의 사법화로 이어진 결과다. 당분간 ‘정치 검사’라는 말이 없어지기 어려운 이유다.
● “끝까지 우기면 본 사람도 자신의 기억을 의심할끼다”
박동호의 정치적 스승인 장일준은 박동호에게 극 중에서 이렇게 말한다.
“니도 정치를 하다 보믄 X을 푸지게 싸는 날이 있을끼다. 고개도 숙이지 말고, 부끄러워 하지도 마라. 끝까지 우기면 언젠가 그 대로변에서 나를 본 사람도 자신의 기억을 의심할끼다.” |
조 대표의 강성 지지층은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조 대표의 범죄 혐의를 외면한 채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 스스로도 신당을 창당하며 12석 정당의 수장으로 자리잡았다. 대장동 및 대북송금 의혹 등에 연루된 이 전 대표도 “검찰의 창작 수준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며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그는 ‘개혁의 딸’이라는 강성 지지층을 바탕으로 검찰 수사와 재판은 아랑곳하지 않던 그는 급기야 당 대표 연임을 위해 전당대회에 나섰다.
최종적인 사법부의 판단이 남아 있지만 사법기관의 중간 판단은 대중들에게 소구력이 약했다. 물론 사법 불신이 자아낸 결과지만 그 사법리스크는 결국 국민이 떠안게 된 것이다. 조 대표 등이 대법원에서 최종적인 판단을 받더라도 그의 지지층은 잘못된 판결이라고 믿을 것이다. 조 대표는 자녀 입시비리와 청와대 감찰 무마 등 혐의로 2심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올해 2월 8일에도 “검찰 집단의 횡포를 누구보다 온몸으로 겪은 사람으로,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닥쳐 온다 해도 회피하거나 숨지 않겠다”며 “오직 국민만 보고, 국민의 목소리만 듣고, 국민이 가라 하시는 길로 가겠다”고 했다. 형법 교수 출신인 조 대표가 사법적 판단은 무시하고 정치적 판단을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남 눈의 티는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볼 줄 모르는, 정치권의 내로남불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책임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치가 한국 정치를 다운그레이드시키고 있는 것 아닐까. 물론 성추행 입막음 등 각종 의혹에 휘말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여전히 강한 지지를 받는 미국을 보면서 꼭 한국 정치만의 일은 아니라는 데서 위안을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드라마의 결말은 해피엔딩에 가깝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던진 박동호의 철저한 계획에 따라 정수진과 그의 측근이 다툼을 보이다 정수진 스스로 장일준 시해 등을 인정하게 만든 것이죠. 결국 정수진은 구속되고 박동호의 장례식은 국가장으로 치러지게 됩니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긴 것입니다. 극 중 대사와 달리 내심 진실은 거짓을 이긴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돌풍〉 속에서 보수 진영은 정말 쩌리 그 자체다. 부산 출신으로 공안검사 경력을 지닌 강경보수 성향의 1야당 대표는 품위 없는 경상도 사투리 찍찍 쓰면서 태극기부대를 몰고 다니지만 민주진보(?) 진영에 휘둘리는 밥일 뿐이다. 드라마 속에서 이 사람 말고는 캐릭터 자체가 등장하지 않음. 정말 이건 보수의 위기다.”
윤태곤 정치평론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같이 썼습니다. 이처럼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여권이 아니라 야권이라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여권은 이 드라마의 조연일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번 글에서 야권을 더 박하게 쓰게 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경수 작가는 “인간이 몰락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을 꾸면서도 끝내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몰아붙이기 때문이다”라며 ‘몰락’을 주요 테마로 삼았다고 합니다. 보수여당은 이미 몰락해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에둘러 표현한 걸까요. 윤 대통령은 물론 한 대표와 오세훈 서울시장,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 홍준표 대구시장, 국민의힘 원희룡 전 의원과 안철수 의원 등 보수 진영 대표 주자들의 어깨가 무거울 것 같습니다.
어쨌든 넷플릭스 〈돌풍〉이 인기를 끄는 이유를 필자는 거듭 제목에서 찾아봅니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숨 막히는 오늘의 세상 다 쓸어버리고”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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