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배터리 정보공개 추진에 "나쁠 것 없지만..."
연이어 발생한 전기차 화재 사고에 정부가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국내 배터리 업체와 자동차 업체는 정보공개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보지만 장기적으로는 후폭풍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토교통부는 8일 전기차에 탑재된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국토부 관계자는 "배터리 정보가 영업비밀로 할 만한 성질인지 봐야 하고, 만약 공개한다면 어떤 식으로 소비자한테 알릴 수 있을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는 지난 1일 인천 청라 아파트에서 불이 난 메르세데스-벤츠 'EQE' 차량에 중국 파라시스의 NCM 배터리가 탑재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시작됐다. 당초 'EQE'에는 CATL 배터리가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었으나 이와 달리 파라시스 제품이 탑재됐다.
벤츠는 여러 배터리 업체에서 납품을 받아 전기차를 만들었고 파라시스와 관련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벤츠가 정확하게 배터리 회사 정보를 알리지 않았다고 반발했다. 유명하지 않은 파라시스의 배터리를 탑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그동안 자동차 업계는 부품과 관련한 정보는 납품업체와 제조업체 양 측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공개하지 않았다. 특히 전기차에서 배터리는 차량 가격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부품이다. 전동화 전환 과정에서 배터리 수급을 위해 고객사 확보가 중요한 만큼 관련 정보 공개는 더 민감하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가 변하자 업체에서도 공개에 따른 여파를 검토하고 있다. 일단 배터리 업계는 나쁠 것이 없다는 반응이다. 중국산 배터리보다 국산 품질이 좋다는 소비자 인식이 강한 만큼, 제조사가 공개되면 자연스레 국산을 탑재한 전기차로의 쏠림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서다. A 배터리사 관계자는 "실제로 니켈·코발트·망간(NCM) 등 삼원계 배터리는 국산 생산 기술력이 더 높고 품질도 좋다"며 "이와 관련한 소비자 선택의 여지가 커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완성차 업체들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현대차·기아의 경우 전기차 생산 이후에는 어느 회사 배터리를 쓰는지 굳이 숨기지 않는다. 차 소유주가 마음만 먹으면 확인할 수 있는 정보인데다가 레이 EV 등 특정 차종을 제외하면 국산 배터리를 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다만 "배터리는 셀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고 여러 부품이 합쳐져서 들어간다"며 "공개를 하게 된다면 공개 범위를 명확히 해야 피해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 환경부의 전기차 보조금 업무처리 지침에 따르면 2025년부터 배터리 안전 정보 제공 업체에 30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규정이 있다. 완성차 업체들은 이미 해당 지침에 따라 배터리 정보 공개를 준비 중이다.
한편 글로벌 전기차 주요시장은 여전히 배터리 제조사 공개를 하지 않고있어 이 같은 국산으로의 쏠림 현상이 가져올 판매확대 효과는 미미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내수시장에 한정된 현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B 배터리사 관계자는 "미국과 유럽 등 전기차 주요 시장과 비교하면 내수시장 규모는 미미하다"며 "국산으로의 쏠림 현상이 나타난다 해도 전체 배터리 판매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국내에서 전기차 대중화가 더 지체돼 배터리 업계 역시 잃을 게 더 많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배터리 공급사 다각화는 완성차 업계가 전기차 가격을 제어하는 핵심 수단인데, 특정 배터리로의 쏠림이 심화되면 전기차 가격이 결국 지금보다 뛸 수 있다는 지적이다. 자동차 가격이 '옵션'이 추가될수록 오르는 것 처럼, 국산 배터리가 마치 옵션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C 배터리사 관계자는 "내연기관차 보다 높은 가격은 전기차 대중화를 늦추는 핵심 원인"이라며 "배터리 제조사 공개가 전기차 가격 상승으로 연결되는건 배터리업계로서도 좋지 않은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이태성 기자 lts320@mt.co.kr 안정준 기자 7up@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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