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사격 선수처럼, 인생은 ‘장비빨’이 아니다
지난 봄 나 빼고 전 국민이 다 하고 있는 것만 같은 달리기 대열에 동참하기로 마침내 결심했다. 달리기를 준비하는 과정은 즐겁고도 설렜다. 달리기에 웬 준비 과정이냐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 냅다 뛰면 되는 거 아니냐고? 모르시는 말씀.
자고로 모든 운동과 취미에는 ‘장비빨’이 생명 아니겠는가. 골프나 낚시도 아니고 달리기에 무슨 장비빨이냐 묻는다면 나 역시 먼저 뛴 친구에게 그렇게 물었다가 “무릎 나가고 싶으면 아무거나 신고 뛰던가”라는 독한 대답을 들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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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준비는 1년 동안 옷과 신발을 새로 사지 않는다는 올 초의 비장한 결심에서 나를 해방시켜줬다. 지구의 쓰레기를 줄이는 것보다 소중한 게 내 무릎 아니겠는가. 요즘 ‘핫하다’는 러닝화 브랜드들의 ‘내돈내산’ 품평을 뒤져보고 매장에 가서 신어보고 하프를 뛰는 친구들의 조언도 들었다. 2주 넘는 고심 끝에 운동화를 결정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달릴 때 주머니를 걸치적스럽게 하지 않으면서 핸드폰과 신용카드 등을 소지할 수 있는 러닝벨트와, 페이스, 몸 상태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스마트워치 등은 내가 몰랐던 장비의 신세계였다. 여기에 ‘흡습속건’ 재질로 육체적 쾌적함을 유지해주면서 대회에 나갔을 때 요즘 러닝문화의 대세인 젊은 세대 앞에서 심리적 쾌적함을 최대한 방어할 수 있는 복장의 미학 또는 빼놓을 수 없는 중년의 장비빨이다. 나는 아직 상처 입지 않은 중년 러너의 자존심을 미리 회복하겠다는 각오로 셔츠와 바지와 재킷을 쟁였다. 러닝용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안 쓰던 스포티파이를 깔 것인가에 대한 고뇌를 털어놨을 때 “그냥 달리기를 하지를 마”라는 죽비 같은 조언을 듣고서야 준비를 마치고 비로소 쿠션화에 실은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이후 러닝 앱 속 코치님의 “할 수 있습니다!” 우쭈쭈가 다소 시큰둥해질 무렵 ‘중년은 장비빨’이라는 나의 세계관을 뒤흔드는 인물을 만났다. 맞다. 한국 선수 김예지와 함께 이번 올림픽 밈 최대 양산자 투르키예 사격선수 유수프 디케츠다. ‘진짜 히트맨(암살자)을 내보냈다’는 댓글과 영화 ‘펄프 픽션’에서 총을 겨누는 갱단 조직원들 옆에 경기하는 그의 모습을 따다 붙인 밈이 만들어진 건 그에게서 운동선수용 장비가 하나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사진은 심박수 60회를 유지하며 상대방을 조준하는 20년 차 히트맨같은 정면 모습이 아니라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오른손으로 겨냥하는 옆모습 사진이다. 김예지 선수의 같은 자세가 주는 카리스마와 달리 어쩐지 ‘주머니에 담배가 없네, 다 쏘고 사러 가야겠다’는 아재의 다짐이 담겨있는 것처럼 보이는 왼손의 실루엣과 타원형 곡선이 만들어내는 은은한 복부 라인, 사춘기 딸을 키우는 아빠의 스트레스를 보여주는 듯한 희끗희끗한 머리색이 기묘하게 마음의 평화를 줬다. 시종 보는 이의 애간장까지 녹이는 긴장의 연속인 올림픽 무대라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인생은 장비빨이 아니야.’
물론 이런 이미지는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두 눈으로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적절한 바이저를 찾지 못해서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옆에서 테러가 벌어져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같은 모습도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 마음 속에서는 비명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알 수 없는 그의 마음 속이 아니다. 두려움과 맞설 수 있는 장비로 무장하지 않고 어떤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단단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메달과 상관없이 중년에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처럼 보인다. 자신의 실수나 실패에 어떤 핑곗거리를 대지 않는 사람의 자유와 당당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핑계를 대지 않고 마음 속에 일렁이는 파도를 제압할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은 믿음을 준다. 나이 들어 믿음을 주는 동료나 선배, 이웃이 되는 것 만큼 멋진 일도 없다. 그런 점에서 올해 나이 쉰하나(1973년생), 유수프 디케츠의 결승 장면은 ‘너도 늙는다’ 선정 2024 파리올림픽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힐 만하다.
그렇다고 장비빨에서 벗어나자고 말할 생각은 없다. 어떻게 버텨낸 임금생활자 생활인데 취미나 운동에 장비빨 세우는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없으면 고단한 중년의 삶을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다만 장비빨은 삶의 활력을 주는 재미일 뿐, 인생의 핑곗거리가 될 수 없음을 의식하며 살 필요는 있겠다. 사십 넘어 오십의 나이에 부모가 지원을 못 해줘서,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해서 내가 대접받지 못하고 산다고 징징거리는 건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10㎞ 완주는 아직 엄두도 못 내는 내가 운동화를 비싼 거로 바꾸면 갑자기 풀코스 완주라고 할 것 같은 환상을 품고 장바구니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짓도 인제 그만 하라는 이야기다.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는?
‘너도 늙는다’의 시즌2를 온라인에서 시작합니다. 더 솔직하고 더 유쾌하고 더 괴로운 노화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갱년기 엄마의 사춘기 아들 ‘사생결단 유혈육아’도 부끄럼없이 쓸 예정입니다. 아들아! 너도 늙는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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