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기갈기 찢긴 조선왕실 사당 터, 미국 대사관 건립 막아낸 사람들

노형석 기자 2024. 8. 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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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 덕수궁 선원전 터 비사
지난 2022년 선원전 터 권역에서 진행된 발굴 작업 현장. 위에서 내려다 본 광경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외세 침략과 망국의 비운이 서린 서울 덕수궁은 20년 전 기적적으로 회생한다. 2002~05년 궁궐에서 가장 신성했던 사당인 선원전 터 영역에 15층짜리 대사관과 8층짜리 아파트 건물을 지으려는 미국 정부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원래 전각을 되살리는 복원안까지 얻어낸 것이다. 30~40대 청년 문화재 지킴이들을 중심으로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이 연대해 저지 투쟁을 3년간 지속한 성과였다.

그들이 싸우지 않았다면 덕수궁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당시 한국의 재발견 사무국장으로 궁궐문화유산 지킴이로 일했던 강임산 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미국 사무소장은 말한다. “스카이라인이 완전히 망가졌겠지요. 공룡 같은 15층짜리 미국 대사관과 아파트들이 바로 뒤에서 궁궐 전각들을 내리누르는 아찔한 경관이 펼쳐졌을 겁니다.”

발단은 1977년 미국 정부가 세종로에 있는 미대사관 이전 방침을 밝히면서부터였다. 처음 꼽은 후보지는 최근 이건희컬렉션 기증관 예정 터로 유명해진 송현동 일대의 당시 미대사관 직원 숙소였다. 하지만 청와대와 정궁 경복궁에서 바로 지척인 고도 제한 구역이어서 한국 정부가 난색을 표하면서 협상 카드로 대신 내건 곳이 당시 정동 경기여고 자리, 바로 선원전 터 영역이었다.

주요 전각터 발굴을 마무리하고 일부 전각의 정비 복원 공정을 준비 중인 서울 정동 덕수궁 선원전 터 영역의 현재 풍경. 이 영역의 파란만장한 공간 역사를 지켜본 회화나무 고목이 황백색 꽃을 한가득 피운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형석 기자
2003년 미국 대사관 건립 논란이 불거진 뒤 지표조사를 벌일 당시 선원전 터 영역의 풍경. 터에 들어섰던 옛 경기여고 운동장 자리에 이 공간의 산증인인 회화나무가 보인다. 당시엔 전경들의 훈련 장소로도 쓰였다. 김종헌 배재대 교수 제공

원래 선원전 영역은 역대 조선왕조 임금들의 어진(초상)과 신주 등을 봉안했던 궁궐 최고의 성소로 흥복전, 흥덕전, 의효전 등 여러 전각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세종대로변 포덕문 근처에 있었으나 1900년 화재로 불타자 1901년 미국 공사관 북쪽 수어청 터(정동 1-8번지)로 옮기게 된다. 고종이 1919년 승하한 직후부터 선원전 터는 일제의 의해 필지가 매각되면서 갈기갈기 찢기게 된다. 선원전 터 뒤쪽에 금칠한 불상이 빛나는 해인사 포교소가 들어서는가 하면, 뒤에는 경성제일고등여학교가 건립됐다. 땅 필지 일부인 정동 39번지는 일제 금융기관에 팔려 조선저축은행(제일은행의 전신)의 간부 사택이 일식·서구식 절충 양옥으로 들어선다. 해방 뒤 39번지 사택은 미대사관 간부 직원 사택이 됐고, 8번지 여학교 터엔 경기여고가 들어섰다. 하지만 1970~80년대 미국 정부와의 협상에선 이런 역사문화적 내력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서울시나 정부 관계자들도 무지했다. 급기야 1984~86년 서울시와 미대사관 쪽은 밀실협상 끝에 당시 을지로입구 미문화원 터와 송현동 대사관 직원 숙소 터를 경기여고 자리와 교환하는 데 합의하게 된다.

하지만 2000년대까지 10년 이상 이런 사실은 공개되지 않았고 경기여고 자리가 덕수궁 터임을 아는 이들은 학계에도 거의 없었다.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2001년. 건물 신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주차규모 사업계획서를 턱없이 낮춰 제출했다가 서울 중구청으로부터 건축인허가 부적격 판정을 받은 미국 정부 쪽은 꼼수를 썼다. 자기들의 외교적 편의를 위해 주택 관련법을 개정해달라고 우리 정부 쪽에 요청한 사실이 언론에 드러나면서 여론의 포화를 맞게 된다. 2002년 4월, 한 서울시 학예직 공무원이 미대사관 건립 추진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문화재 지킴이 강임산씨에게 만나자고 요청해 뜻밖의 공익 제보를 했다.

선원전 영역을 지칭했던 ‘영성문 대궐’의 1903년 모습. 영국 뉴캐슬 대학에 원본이 소장된 구한말 사진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그 공무원이) 80년대 서울시 밀약 내용에 따른 대사관 건립 후속 추진 업무를 맡았는데, 덕수궁의 핵심 공간인 선원전 터인데도 일방적으로 작업이 추진됐고, 사전 조치로 시굴과 발굴 조사를 전담해야 하는 상황에서 반대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죠. 그의 조력으로 80년대 밀실 협상 관련 정보들이 공개됐고, 건립 터가 소중한 옛 궁궐터의 중심이라는 사실도 명백하게 드러났어요.”(강임산)

강씨는 궁궐 지킴이 동료였던 천준호 한국청년연합회 사무처장(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함께 시민단체들 쪽에 공동 대응하자는 ‘사발통문’을 돌렸다. 5월30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반대 성명을 낸 것을 시발로 30여개 시민단체가 연대했다. 덕수궁 터 미대사관 신축을 반대하는 시민모임을 결성하고 미대사관과 덕수궁 정문 앞 1인시위, 시민 서명 등을 2년여 동안 했다. 근대유산 전문가로 선원전 터 역사에 밝았던 김정동 목원대 교수가 강연을 펼치며 앞장섰고, 강찬석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등 문화재 활동가들도 속속 합류했다. 시민들 반응은 뜨거웠다. 청소년도 1인시위 대열에 섰고, 가수 서태지 기획사 음악가들이 응원 공연도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전면 철회를 요구하는 시민모임 관계자들을 미대사관 직원이 면담하면서 “정당한 소유권을 문제 삼는 반미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해 설전을 벌였다. 설계를 맡은 포스트모던 건축 대가 마이클 그레이브스는 방한해 현란한 주상복합 대사관 청사진을 공개하면서 덕수궁의 역사성을 무시한 일방적인 작품 설명만 늘어놓아 국내 건축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2002년 11월 서울 세종로 미국 대사관 앞길에서 덕수궁 터 대사관·아파트 건립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연대모임이 1인시위를 펼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결국 서울시 쪽은 수습을 위해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지표조사로 신축 허가를 재검토하기로 하고, 2003년 6~11월 건축, 역사, 고고학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문헌 및 지표조사를 벌였는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신축건물이 들어설 예정부지는 선원전·흥복전·흥덕전 등의 진전과 빈전 등 궁궐에서도 특히 신성한 영역이 자리했던 지역으로 밝혀졌음. 또한 현장조사에서 문지, 장대석과 사고석을 이용한 석축, 옛 덕수궁의 건축부재로 추정되는 석재 등이 조사되어 궁궐터였음이 확실하므로 시·발굴조사는 필요하지 않으며, 향후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위상을 높이는 방안으로 보전되어야 할 것임.”

지난 4월25일 열린 선원전 터 권역 공개 기념행사 현장. 최응천 문화재청장이 필립 골드버그 주한미국대사와 선원전 터를 두른 이명호 작가의 아트펜스(예술벽)를 살펴보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한국문화재보호재단과 중앙문화재연구원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이 11월8일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에 낸 보고서는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해방 뒤 건물이 들어서면서 궁궐 유적은 대부분 파괴돼 없어진 줄 알았는데 주요 전각 터가 거의 온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조사를 이끈 건축사가 김종헌 배재대 교수는 “역사의 거대한 힘을 보여준 성과였다”고 떠올렸다.

미대사관 건립 논란은 새 국면에 접어들었고 결국 2005년 1월 문화재위원회 합동분과회의는 선원전 터의 대사관·아파트 신축 예정부지에 대해 ‘보존’ 권고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한국과 미국 정부가 다시 수년간 협상한 끝에 2011년 사대문 밖 용산 캠프 코이너 지구를 대체지로 확정하는 협약을 맺으면서 시민모임의 온전한 승리로 끝난다. 문화재청 관계자들도 사태 수습 과정에서 고종이 1896~97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아관파천 당시 피신로로 추정되는 작은 오솔길 추가 발굴과 구한말 미 공사관 지도 기록 등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린다. 2018년 이래 역사산책로가 된 ‘고종의 길’이 탄생한 내력이다.

1918년 당시 덕수궁 선원전 전각에서 조선 왕실 왕족들이 제례를 올리는 광경. 국가유산청 제공

지난 4월부터 시민공원으로 개방된 선원전 터 권역은 2039년까지 예정된 복원정비의 도정을 밟게 됐다. 선원전 터에 버티고 서서 눈부신 황백색 꽃을 가득 피워내고 있는 200살 넘은 회화나무는 덕수궁 역사의 산증인이다. 이 고목을 바라보며 지금은 거의 잊혀진 20년 전 덕수궁 지킴이들의 노력을 떠올려본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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