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폭탄' 아닌데…"전기차 싸도 안 사요" 겁먹고 예약 취소까지
[편집자주] 전기차 화재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전기차 자체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누구보다 빠르게 전동화 전환에 투자했던 한국 기업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들 이 이번 전기차 화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어떤 대응책을 만들고 있는지 짚어본다.
"지하에는 주차도 하지 말라는데 전기차를 누가 사겠습니까."
연이은 전기차 화재 사고에 자동차, 배터리 등 관련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전기차 시장이 캐즘(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둔화)으로 성장이 멈춘 상황인데 소비자들의 인식마저 급격히 나빠지면서 위기 신호가 읽힌다. 가성비 전기차를 앞세워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려 했던 전략에도 수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7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아파트 등을 중심으로 전기차의 지하주차를 막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지난 1일 인천 서구 청라동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에서 메르세데스-벤츠 전기차인 EQE 모델에서 화재가 발생해 주변 차량 수십대를 전소시킨 탓이다. 일선에서는 전기차를 구매하려고 했던 고객들의 예약 취소도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 소비자들이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게 만들었던 큰 요인 중 하나가 화재였다. 전기차는 배터리에 충격이 가해졌을 때는 물론이고 충전 중이거나 운행 중, 심지어 주차 중 화재 발생 위험이 있다. 실제로 전날에도 충남 금산에서 충전 중이던 기아 전기차 EV6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사고가 있었다. 화재가 발생하면 소화시키기 쉽지 않은 것도 단점으로 꼽힌다.
화재 사고가 연달아 발생하며 전기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커지고 있다. 한번 위험하다는 인식이 박히면 이를 바꾸기 쉽지 않은 만큼 이번 사고가 미칠 여파를 놓고 국내 전기차, 배터리 업계의 위기감이 크다. 전기차 판매 둔화가 현실화한 상황에서 전기차에 대한 불안감마저 커지면 시장을 더 키우기 어려워서다.
이미 전기차 시장 성장 둔화는 관련 업체들에게 부담이 될 수준까지 진행됐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1407만대로 전년 대비 33.5% 증가했다. 높은 성장률이지만 2021년(109%), 2022년(56.9%)과 비교하면 성장세 둔화가 눈에 보인다.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16.6%로 지난해의 절반 수준이다. 국내 시장만 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2020~2022년에 걸쳐 국내 전기차 판매는 두 자릿수 이상의 증가율을 보였으나 2023년에는 전년대비 1.1% 역성장 했다. 올해 상반기 국내 전기차 판매량은 6만5557대로 전년 동기보다 16.5% 감소했다.
이런 흐름은 현대차·기아, LG에너지솔루션, SK온 등 상대적으로 일찍 전기차 시장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에 부정적이다. 이들 기업은 전기차 전환과 관련된 기술 개발에 많은 돈을 투자했다. 그만큼 전기차 시장의 위기가 회사의 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나마 자동차 업체들은 하이브리드차 판매를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배터리 업체들은 적자 규모가 커지고 있다. SK온의 경우 11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자동차 업계는 이같은 성장세 둔화를 저렴한 전기차로 만회하려는 계획이었다. 올해 출시된 새로운 전기차의 경우 현대차의 캐스퍼 일렉트릭, 기아의 EV3 등 가성비형 모델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배터리 화재 등 사고로 인해 중저가형 전기차를 찾는 사람도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 전기차 파이를 늘리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자동차 업계 고위 관계자는 "연이은 화재사고에 경기침체까지 겹치면 내연기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전기차 판매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보릿고개가 길어질 수 있다고 보고 전략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혜영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전기차 수요 둔화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이차전지 업종 실적 회복 시점도 불투명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 2023년 9월22일 새벽 전남 광양에 위치한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주민 60여명이 연기를 흡입했고, 130여명이 대피했다. 주차돼 있던 내연기관 차량에서 갑자기 발생한 불로 인한 화재였다. 불은 자동차 10여대를 불태운 후 3시간만에 진화됐다.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아 화재 규모가 커진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일 발생한 인천 청라 아파트 화재 사고와 판박이 사례다. 광양에서는 내연기관 차량이, 인천에서는 전기차가 발화 포인트 였다는 것이 차이난다. 다른 점은 또 있다. 사고 이후 전기차는 마치 시한폭탄 같은 취급을 받고 있지만, 내연기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전기차의 지하주차장 이용 금지 등이 거론되는 것을 두고 과잉대응이라는 말이 적잖게 나오는 이유다.
사실 전기차의 화재 확률은 내연기관보다 떨어진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1만대당 내연기관 화재는 1.9건, 전기차 화재는 1.3건 수준이다. 일각에서는 전기차 배터리 합선 등에 따른 '열폭주'의 위험성을 우려하지만, 광양의 사례에서 보듯 내연기관 역시 주차된 상태에서 발화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지난 2일만 해도 대구 중구의 한 주상복합건물 지하 1층 주차장에 주차돼 있던 내연기관 승용차에서 불이 났다. 최근 1~2달 간 비슷한 내연기관 화재는 서울 양천, 인천 송도, 경기 남양주, 대전 중구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발생했다.
전기차 배터리의 경우 800도가 넘는 고온의 불이 나는 경우가 많고, 단단한 밀폐 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화재에 주의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화재에 유의해야 하는 건 내연기관도 마찬가지다. 가장 큰 불로 번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내연기관이 오히려 3분 정도 더 빠르다. 내연기관에는 휘발유나 경유를 비롯해 엔진구동에 사용되는 각종 유류들도 들어있어서 화재 성장 속도가 더 빠른 측면도 있다.
조선호 경기도소방재난본부장은 지난해 '전기차 실화재 진압 시연회'를 통해 "전기차의 초진이나 확산 차단이 내연기관 차량보다 더 어려운 것은 특별히 아니다"며 "막연하게 '전기차는 불이 안 꺼진다' 이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 내연기관과 전기차를 둘러싼 모든 차량 화재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한 셈이다. 화재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스프링클러 설치 규정 강화 등이 현실적 대책이 될 수 있다. 청라 전기차 화재나 광양 내연기관 화재의 경우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으며 초동 대응이 사실상 이뤄지지 못했다. 반면 지난 5월8일 전북 군산 아파트 지하주차장 전기차 화재는 별다른 피해를 남기지 않고 40여분만에 진화됐다. 스프링클러가 정상 작동한 영향이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에 보다 직접적으로 물을 뿌릴 수 있는 '하부 스프링클러'를 충전지역에 설치한다면, 대형 화재 가능성을 더욱 낮출 수 있다는 평가다.
전기차와 배터리를 '폭탄' 취급하는 과도한 우려는 글로벌 트렌드에도 맞지 않다. 미국은 2030년 전기차 판매 비중을 5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고, 유럽은 2035년 내연기관 퇴출을 목표로 잡았다. 전기차는 최소 연 20%대 성장을 보장하는 미래 먹거리 시장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기차·배터리를 죄악시하는 풍조가 확산된다면, 국내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만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배터리 산업만 봐도 연산 20GWh(기가와트시)당 4000명 수준의 고용이 가능하다. 장비·소재 등을 납품하는 중소기업까지 포함하면 그 경제효과는 더 클 수밖에 없다.
정교한 제도적 지원도 필요하다. 최해옥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보고서를 통해 "배터리 전주기 안전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리스크 분석에 기반한 탄력적 규제를 적용하는 시스템을 조속히 정비해야 한다"며 "사고 예방, 예측 차원의 사전진단 기술개발에 집중하면서 R&D(연구개발) 지원 등 제도적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태성 기자 lts320@mt.co.kr 최경민 기자 brow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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