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좌파, 문화는 보수"…독일 '보수적 좌파'의 등장?
올해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유럽연합 회원국의 국내 정치 변동에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지면에서도 이런 격동을 때맞춰 포착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한데 꽤 주목할 만한 선거 결과가 나왔음에도 잘 소개가 안 된 나라가 있다. 독일이다. 독일에서도 극우정당이 약진했다. 1위는 30.02%를 득표한 우파 대표정당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CDU/CSU, 이하 '기독교연합')이 차지했고, 반이민, 반무슬림을 내세우는 극우파 '독일을 위한 대안(AfD, 이하 '독일대안당')'이 15.89%를 얻으며 2위를 기록했다.
반면 현 연립정부를 주도하는 사회민주당(SPD)은 13.94%를 득표해 3위에 그쳤다. 사회민주당의 연정 파트너인 녹색당은 11.90%를 얻어 4위를 했는데, 유럽의원 숫자가 21명에서 12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또 다른 좌파정당인 좌파당의 득표율은 2.74%에 머물렀다
흥미로운 것은 5위를 한 정당이다. '자라 바겐크네히트 연합(BSW, 이하 SW연합)'이라는 기이한 이름의 신생 정당이 6.17%를 획득하며 녹색당을 뒤쫓았다. 이 당의 이념은 대체로 좌파로 분류되지만, 유럽 정치에서 익숙한 '사회민주주의', '녹색', '급진좌파' 같은 범주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당명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이 당의 얼굴격 정치인에 따르면, '보수적 좌파' 정도의 표현이 어울린다고 한다. '보수적' '좌파'라? 우리의 상식을 뒤흔드는 당혹스러운 자기 규정이 아닐 수 없다.
독일 좌파의 무덤이 된 현 연립정부
SW연합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그 배경이 된 현 사회민주당-녹색당-자유민주당(FDP) 연립정부(이른바 '신호등' 연정)부터 짚어야 한다. 무려 16년이나 지속된 앙겔라 메르켈 시대가 끝난 뒤에 실시된 2021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은 기독교연합을 불과 1.6% 차이로 앞서며 어렵사리 1위를 차지했다.
총선 결과에 따라 사회민주당을 대표해 신호등 연정을 이끌게 된 올라프 숄츠 총리는 사실 좌파 색채가 뚜렷한 인물도 아니고,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인도 아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등장한 사회민주당 주도 정부를 향한 기대가 없지는 않았다.
야당 시절이 길어지고 더구나 그 와중에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질서가 흔들리면서 독일 사회민주당 안에서도 젊은 당원들을 중심으로 다소 급진적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 강령에 숨어 있던 '사회주의'를 끄집어내 대기업이나 금융기관의 사회적 소유를 주창하는 이들이 다시 나타났다. 그러다 보니 숄츠 정부가 이런 목소리를 그래도 조금이나마 반영하지는 않겠냐는 관측이 있었다.
그러나 숄츠가 총리 취임 선서를 한 지 두 달만에 터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이런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이제는 많은 이에게 상식이 됐지만, 그간 독일은 값싼 러시아 천연가스 공급에 의존해 제조업 설비를 돌렸고, 핵발전소를 줄이는 에너지 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산 가스 공급망이 끊어지자 독일은 갑자기 에너지 위기와 물가고에 직면했다.
숄츠 총리 자신은 집권 초기만 해도 러시아, 중국에 대해 미국과는 좀 다른 접근을 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공공연히 반대했던 슈뢰더만큼도 결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숄츠 개인의 한계 탓도 있지만, 빌리 브란트의 후예이면서도 독자적 외교 정책에 관해 진지하게 토론하지 않는 사회민주당도 문제였다. 또한 좌파 지식인 사회의 원로라는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인물이 친미-친유럽연합 대서양주의의 낡은 곡조에 따라 여론을 몰아간 결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호등 연정이 에너지 대란의 늪에서 허우적대도록 만든 가장 강력한 힘은 연정 내부의 제2정당 녹색당에서 나왔다. 창당 이래 줄곧 남녀공동대표제를 채택해온 녹색당은 연정에 두 명의 대표를 모두 입각시켰다. 로베르트 하베크가 부총리 겸 경제-기후부장관이 됐고, 아날레나 베어보크가 내각 내 실질적 2인자인 외무부장관이 됐다. 이 가운데 베어보크는 2021년 총선을 앞두고 한때 녹색당 지지율이 사회민주당을 앞지르자 최초의 녹색당 소속 독일 총리로 입에 오르내리기도 한 인물이다.
한데 베어보크 외무부장관이 펼친 정책의 색깔은 녹색당 창당 정신인 생태와 평화를 상징하는 '풀빛'이 아니라 군복의 '카키색' 쪽이었다. 베어보크는 단순히 미국의 압력 때문에 러시아에 호전적인 입장을 취한 게 아니라, 스스로 앞장서서 동쪽의 전쟁을 독일의 군비 재확충 기회로 만들었다. 가스 공급 중단으로 당장 서민들의 겨울 난방이 어려워지고 물가가 치솟는데 녹색당 대표였던 두 장관은 국방 예산 증액을 주도했다.
이러니 2021년에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에 표를 던진 약 40%의 지지층이 와해돼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들은 메르켈 시절보다 더 나은 경제 현실을 바랐지만, 오히려 더 나빠진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풀빛'을 내세우는 줄 알았던 정치세력은 경제난 속에서 국방비를 늘리는 '카키색'의 주역이 돼 있다. 이런 형국에 탄소 가격을 올린다느니 내연기관차 생산을 중단시키겠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제대로 들릴 리 없다. 누구라도, '좌파'란 무엇 하는 이들인가 라고 반문할만하다.
사회민주당, 녹색당 모두 야당이던 메르켈 시절만 해도 좌파 전체가 몰락할 일은 없었다. 사회민주당이 침체 상태면 녹색당 지지율이 올랐고, 녹색당이 지지부진하면 사회민주당이 반등할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사회민주당, 녹색당 모두 지지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다. 사회민주당에는 노동조합 내 관성적 지지자만이, 녹색당에는 물가고의 타격을 받지 않은 안정된 중간계급만이 남을 판이다.
그나마 좌파당이 두 당의 실망층을 흡수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2000년대 말에는 실제로 이런 역학이 작동해 좌파당 지지율이 전국 평균 10%를 넘기도 했다. 그러나 좌파당은 프랑스나 스페인에서 주류 좌파정당에 도전하던 세력들과는 달리 나름의 '좌파 포퓰리즘'을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 와중에 좌파당의 유일한 대규모 지지 기반이던 구동독지역 노동계급은 대거 독일대안당으로 이동했다.
말하자면 지금 신호등 연정은 독일 좌파에게 오랜만의 도약의 발판이 아니라 집단적인 무덤이 되어 있다. SW연합을 어떻게 평가할지 고민하기 전에 우리는 일단 이 조직이 바로 이런 역사적 궁지를 배경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실험임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민 문제, 전쟁 문제로 좌파당과 갈라선 SW연합
자라 바겐크네히트는 좌파당 의원단 대표를 역임하기도 한 이 당의 간판 대중정치가였다. 경제학을 전공한 이론가이기도 해서 다수의 저작도 냈고, 그 중 한 권은 우리말로 번역되기도 했다(<풍요의 조건: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법>, 장수한 옮김, 제르미날, 2018). 이 지면에서 바로 이 책과 저자를 우호적으로 소개한 적도 있다("자본주의는 자유주의를 배반한다", <프레시안> 2018. 3. 20).
바겐크네히트는 좌파당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좌파 포퓰리즘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 과정에서 당 내 다수와 의견이 엇갈리자 2018년에 '아우프슈텐(Aufstehen, '지양')'이라는 정치조직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비록 1년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문제는 바겐크네히트가 기존 좌파 지지층 한계선을 넘어 대중을 결집하기 위해 물고 늘어진 쟁점이 이민 규제였다는 것이다. 바겐크네히트는 구동독지역 서민들이 극우파에 기우는 주된 이유가 이민 증가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바겐크네히트는 기왕에 정착한 이주민이나 난민의 권리는 보장하되, 당시 메르켈 정부가 추진하던 대규모 난민 수용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민, 난민을 제대로 통합할 수 있는 독일 사회의 물질적, 문화적 여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바겐크네히트의 입장은 처음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16년에는 한 반파시즘단체 활동가가 좌파당 회의에서 바겐크네히트의 얼굴에 항의의 표시로 초콜릿 케이크를 던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바겐크네히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급진적 사회운동가들이 노동계급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다고 반박했다.
유럽 좌파 안에 비슷한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영국 노동당 안의 '블루 레이버(Blue Labour)' 그룹은 지식 중간계급에 기운 노동당의 지지 기반을 노동계급 쪽으로 되돌리려면 복지국가 복원이나 친노동조합 정책뿐만 아니라 브렉시트 지지 그리고 이민 규제 필요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블루 레이버' 그룹의 독특한 입장은 최근 노동당 안팎에서 신자유주의 지구화 이후의 대안으로 '진보적 애국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결합이 논의되는 분위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독일에서는 바겐크네히트가 2021년에 낸 저작 <독선: 공공성과 사회통합을 위한 나의 대항기획>에서 이런 노선을 한 발 더 밀고 나갔다. 이 책에서 바겐크네히트는 주로 녹색당의 지지 기반을 이뤄왔고 최근에는 좌파당에서도 지지층의 중심으로 부상한 고학력 중간계급의 '좌익 자유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라이프스타일이나 문화적 구별짓기를 중심에 두는 이 집단의 태도가 노동계급을 더욱 소외시키고 사회를 더 갈가리 찢어놓는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 바겐크네히트가 내놓는 대안은 "경제는 좌파, 문화는 보수"라는 문구로 요약된다. 강력한 복지국가와 중소기업 중심 산업정책, 공공 주도 에너지 전환 같은 경제적 대안이 다시 좌파 정치세력의 중심 의제가 되어야 하며, 다문화주의나 소수자 정체성 같은 문제와 관련해서는 노동 대중의 평균적 시각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 소개한 '보수적 좌파'라는 자기 규정은 바겐크네히트의 이런 입장을 가장 짧게 압축한 말이다.
작년 가을, 바겐크네히트를 비롯한 좌파당 탈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창당 과정을 밟은 SW연합은 <독선>의 내용이 조직으로 실체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조직은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좌파당 내 논란이 격화하면서 서둘러 출범했기에 상층 중심, 연방의원 중심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면면이 만만치는 않다. 좌파당 의원당 대표를 역임한 아미라 모하메드 알리가 합류했고, 사회민주당에 실망한 구서독지역 노동조합 세력을 이끌고 좌파당 창당을 주도했던 클라우스 에른스트도 결합했다. 이민 규제를 주창하는 정당이지만, 역설적으로 창당을 주도한 전 좌파당 의원 중 상당수는 이민자 가족 정체성이 강한 인물들이다.
이러한 SW연합 창당 과정은 최근 한국의 정의당에서 총선을 앞두고 벌어졌던 잇단 탈당 사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게만 보면 SW연합은 지지율이 끝없이 하락하는 좌파당을 버리고 살 길을 찾아 나선 기회주의자들의 모임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시각에서만 보기 힘든 (그리고 한국 정치의 유사 사례와는 사뭇 다른) 이들만의 궤적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쟁 문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그리고 그 주변의 지식인 사회가 러시아와의 대결이라는 한 쪽 방향으로만 쏠려 있을 때에 바겐크네히트는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대규모 평화 시위를 발의해 성사시켰다. 나치 전력 탓인지 좌파를 비롯한 독일 여론주도층 대다수가 기괴할 정도로 이스라엘만 편드는 상황에서 일관되게 가자 주민을 중심에 놓고 발언해온 이들 또한 바겐크네히트를 비롯한 SW연합 참여 정치인들이다(그래서 '반유대주의자들'이라는 비난도 받고 있다).
'교차성'의 강조를 넘어 '계급동맹'의 노력이 필요하다
유럽의회 선거가 끝나고 두 달이 지난 지금, SW연합은 지지율이 더 올라 10% 선을 오르내리는 중이다. 이전에 좌파당을 지지하던 구동독지역 대중이 좌파당이 아닌 SW연합으로 재결집하는 양상인데, 그만큼 독일대안당에 기울 가능성이 높은 유권자들을 SW연합이 흡수하는 셈이다.
하지만 SW연합이 과연 장기 발전 가능성을 지닌 조직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의 조국혁신당처럼 '자라 바겐크네히트'라는 개인 이름을 당명으로 내세운 것부터 뭔가 '임시적' 성격을 강하게 시사한다. 물론 당명 뒤에 "이성과 정의를 위하여"라는 꼬리말을 붙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역시 '자라 바겐크네히트'일 뿐이다. 좌파 포퓰리즘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형태의 실례라고 할까.
더구나 바겐크네히트와 SW연합이 내세우는 담론이나 정책 방향 역시 사회민주당, 녹색당 그리고 이른바 '좌익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단 나의 인상평은, SW연합이 기존 독일 좌파가 만들어놓은 지형 안에서 주류가 점한 진지의 정확히 반대편에 자신들의 진지를 구축한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기성 이념-담론 지형 자체를 재편하거나 극복하기보다는 그 안의 기동 작전을 통해 기성 지형을 한층 더 굳히고 있다는 느낌이다. '보수적 좌파'라는 표현이 딱 그런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SW연합 자체보다도 그 탄생 배경이 된 독일 좌파 전체의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좌파의 규모나 영향력의 차이가 워낙 크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독일 사회민주당, 녹색당이 대표하는 어떤 양상은 그간 한국의 진보-사회운동에서도 흔히 나타났던 모습이다. SW연합이 제시하는 대안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현재 독일 좌파가 처한 역사적 궁지를 확인하고 우리 역시 이런 함정에 완전히 갇히지 않도록 궤도를 급히 변경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교차성'이나 '등가적 연대' 등의 선언적, 윤리적 확인을 넘어 '계급동맹'이라는 오래 된, 고단한 작업을 하루빨리 재개해야 한다(가령 파울로 제르바우도의 <거대한 반격>[남상백 옮김, 다른백년, 2022]이 시도하는 것과 같은 작업). 노동계급의 여러 계층과 지식 중간계급 내 상당부분의 동맹을 구축한다는 시각에서 기존 '진보', '좌파'의 모든 유물을 용광로에 쏟아 붓고 새로운 합금을 뽑아내야 한다. 이 어려운 작업과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 역시 독일과 같은 시간대에 있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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