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회장님만 좋은 일 시키는 인수합병, 법으로 막히나
"경영상 의사결정시 대주주-일반주주 이익 공정하게 고려하라는 취지"
재계 "줄소송 리스크에 경영활동 위축…대주주 의결권 제약.기업 장기이익 저해"
"법과 판례 모두 부재, 일반주주 일방 손해 결정 빈번"…"행위준칙 명확히 할 필요"
국내 주요 기업들이 '회장님'으로 불리는 최대주주에게는 유리하고 일반주주에게는 불리한 합병 등을 잇따라 발표하며 시장에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이사(사내·사외이사 포함)에게 '공정 의무'를 추가하는 상법 개정안이 발의돼 주목받고 있다.
재계에서는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기업의 경영 활동이 위축되고 기업의 장기적인 이익이 저해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미국과 독일 등 선진국에선 이미 이사에게 회사와 주주 이익 모두를 고려하는 의무를 법과 판례 등을 통해 명확히 하고 있어 상법 개정 방향에 관심이 쏠린다.
"이사에게 '주주 공정하게 대할 의무' 신설…위반시 손해배상"
앞서 정부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주주까지 포함하도록 하는 상법 개정 방향을 밝혔다. 하지만 대규모 설비 투자나 R&D(연구개발) 계획 등을 결정할 때 장기적 기업가치 제고를 원하는 회사와 배당을 요구하는 일반주주 등의 의사가 상충할 수 있다는 등의 우려로 개정 움직임이 답보 상태인데 이를 반영해 개정안을 마련한 것이다.
김현정 의원안에는 면책조항이 필요하다는 재계의 의견도 반영돼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이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고 일반주주만으로 결의한 안건에 대해서는 이사가 주주에 대한 공정의무를 다한 것으로 본다"는 조항도 신설됐다.
"모호한 표현, 줄소송 위험있고 경영활동 저해해 장기적 이익 악영향"
이런 상법 개정 움직임에 대해 재계는 또 다시 반발하고 있다. '공정'이라는 표현이 모호해 경영 불확실성을 높이고, 지배 주주의 의결권을 과도하게 제한해 결과적으로 기업의 장기적인 이익을 저해한다는 주장이다.
한국경제인협회 유정주 기업제도팀장은 "'공정'이라는 표현은 모호할 뿐더러 지금도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면 주주대표 소송이 이뤄지는데 이사에게 공정 의무를 지우는 상법 개정안까지 통과되면 기업은 더더욱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앞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까지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 움직임과 관련해 한경협의 반대 근거가 되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연구 용역을 진행했던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권재열 교수도 "소수주주는 대주주에게 유리하면 본인들에게 불공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 분란의 소지가 오히려 늘 것이고 이런 소송 리스크(risk)는 경영 판단 시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개정안은 결국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을 빼고 소수주주만으로 주주총회를 열어야 공정하다는 것인데 소수주주는 배당과 주가 부양에만 관심이 많을텐데 이들에게 회사의 중요 안건에 대한 결정을 맡기는 것이 타당한가"고 반문하며 "결국 이사회가 주가 부양이나 배당 중심의 경영 판단을 할 수 밖에 없고 이렇게 될 경우 기업의 장기이익을 저해하고 결과적으로 지배주주의 재산권을 침해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두산, SK 등 '일반주주 손해' 합병 잇달아…상법 개정에 힘실어
최근 사례로는 두산그룹의 결정이 거론된다. 두산은 두산에너빌리티의 자회사인 두산밥캣을 두산로보틱스로 이전해 두산로보틱스와 두산밥캣 간 포괄적주식교환을 통해 완전 자회사로 만드는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중이다. 시가총액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연 매출이 10조원에 달하는 두산밥캣과 적자를 이어가고 있는 두산로보틱스 간 주식교환비율(합병비율)을 1 대 0.63로 정했는데, 두산밥캣 일반주주들의 반발이 거세다.
합병이 성사될 경우 총수 일가가 대주주로 있는 두산은 자기 돈 한 푼 쓰지 않고 두산밥캣에 대한 간접 지분율을 기존 13%에서 42%로 끌어올릴 수 있지만, 두산밥캣에 투자한 일반주주들은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논란이 일자 금융감독원은 '합병과 관련한 중요 사항이 기재되지 않았다'며 증권신고서에 대한 보완요구를 했고, 두산은 이날 증권신고서를 다시 제출했지만 주식교환비율은 손 대지 않았다.
상장회사 간 결합은 아니지만 SK의 지배구조 개편 움직임도 일반주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SK그룹은 SK이노베이션(이노)과 비상장사인 SK E&S의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관련법상 상장사가 비상장사와 합병할 경우 최근 주가(주당 11만원) 또는 장부상의 순자산가치(주당 24만원) 중 하나를 기준으로 주당 가치(합병가액)를 정할 수 있는데, SK는 최근 주가를 기준으로 양사의 합병비율을 1 대 1.19로 정했다.
이렇게 되면 최태원 회장 등 SK 대주주의 지배력은 더 강화되고, 자산 가치 방식을 택하면 지분율은 기존보다 낮아진다. "합병으로 최대 주주 SK와 SK의 최대 주주인 최태원 회장 일가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SK이노 일반 주주들의 지분가치가 희석되는 손해를 입게 된다"(경제개혁연대)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사가 회사·이익 공정하게 고려할 의무는 '글로벌 스탠다드'"
글로벌 기업 다수가 위치한 미국과 독일 등은 이미 법과 판례 등을 통해 이사에게 회사의 이익 뿐 아니라 주주의 이익까지 고려할 의무를 명확히 하고 있다는 점도 상법 개정 움직임에 힘을 싣고 있다.
미국 모범회사법은 "이사가 회사와 주주를 공정하게 대할 의무를 위반하거나 그에 따른 결과가 발생할 경우 법에 따라 소송이 가능하고 (이사는) 회사 또는 주주에게 책임을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영국 회사법도 회사의 이사는 전체로서의 주주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도록 규정한다. 심지어 중국도 7월부터 시행된 개정 회사법을 통해 동사(이사)가 지배주주나 실제 지배권자의 지시에 따라 회사 또는 주주의 이익을 해칠 경우 손해배상을 책임지도록 하고 있다.
반면 국내는 법도 판례도 빈약하다. 국내에서는 지배주주가 임원일 경우 자신이 주주총회에서 결의하는 것과 관련해 하급심에서 무효 판결이 나긴 했지만 그 외에 합병 등 대주주와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 있는 경영 판단 시 대주주가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규정이나 판례가 없다.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상훈 교수는 "미국은 판례를 통해 이사가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갖고 있다는 것이 워낙 확고하기 때문에 조문이 더 명확하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주주 보호가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보다 명확한 조문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사에게 의무를 지우지 않기 때문에 두산과 같은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을 맡고 있는 천준범 변호사는 "(재계는) 회사와 일반주주, 대주주와 일반주주를 '공평(공정보다 공평이라는 표현이 개정안 취지상 더 잘 맞을 것 같다고 설명)하게 대할 의무'가 모호하다고 하지만 상장회사 합병이나 분할 등의 이슈가 발생하면 합병 비율이 결정되는 동시에 누가 이익이고 손해인지는 너무나 명확하게 결정되기 때문에 모호할 것이 전혀 없다"고 꼬집었다.
이어 "외국에선 기업이 합병을 추진할 때 이에 따라 예상되는 주가 상승 비율과 재무적, 사업적 시너지가 등을 대단히 상세하게 설명하고 일반주주는 합병비율에 따라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장기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까지 고려해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지만 국내에선 합병의 목적과 효과, 시너지를 대단히 추상적으로 제시하는 관행이 만연하다"며 "두산과 SK처럼 어느 한쪽은 이익, 다른 한쪽은 손해인 합병과 분할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사에게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공정하게 대할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명확한 행위준칙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필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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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김수영 기자 sykim@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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