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이 ‘탐관오리’로 찍었던 민영환…그는 어떻게 자결순국의 길 택했나[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백성에게 해(害)를 끼치는 자들을 없애려고 봉기했다는건가.”(심문)
“그렇다. 내직에 있는 자가 매관매직을 일삼고….”(전봉준)
“누구를 가리키는가.”(심문)
“민영준과 민영환, 고영근이다.”(전봉준)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1855~1895)의 심문 기록(1895년 2월11일)이다.
전봉준은 ‘관리들의 탐학’을 거사의 이유로 들며 그중 민영준·민영환·고영근 등을 ‘탐관오리 3인방’으로 꼽았다.
그런데 이 3명 가운데 의외의 이름이 들어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직후 순국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이다.
얼마전 국가 등록문화재가 된 ‘민영환’ 유서를 보라. ‘육군부장 정일품 대훈위 민영환’이라고 쓴 명함(가로 6㎝, 세로 9.2㎝)의 앞 뒤에 ‘이천만동포에게 고하는 글’이 연필로 적혀있다.
“오호!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영환은 죽어도 죽지않고(死而不死) 저승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니…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그 유명한 충정공 민영환의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사이불사(死而不死)’ 유언이다.
■탐관오리의 대표주자
이상한 일이 아닌가. 다른 분도 아닌 전봉준에게 ‘탐관오리의 대표’로 낙인 찍힌 분이 불과 10년 만에 망국의 책임을 지고 자결 순국했을까.
그 분의 배경을 살펴보자. 민영환은 당대 제일의 왕실 외척인 여흥 민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생부는 형조판서를 지낸 민겸호(1838~1882)였지만 큰아버지 민태호(1834~1884)의 양자가 되었다.
생부(민겸호)의 누이는 흥선대원군(1820~1898)의 부인(여흥부대부인 민씨·1818~1897)이었다.
그러니 민영환은 고종과는 사촌 사이였다. 1878년 18세에 과거(문과)에 급제한 민영환은 초고속 승진한다. 가문의 후광 덕분이었다.
21살 때 1881년 당상관(동부승지·정3품)에 발탁됐고, 1년 뒤(1882년) 22살에 성균관 대사성(서울대 총장 및 성균관장)-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가 되었다. 민영환 뿐이 아니었다.
매천 황현(1855~1910)은 “민씨 일파는 한결같이 탐욕스러워…중앙 관리는 물론 지방의 수령까지 차지했다”(<매천야록>)고 민씨의 권력 독점과 탐학을 비판했다.
결국 곪았던 것이 1882년 6월 임오군란으로 터졌다. 구식군인들에게 지급할 봉급미를 13개월치나 주지 않은 것이 직접적인 발단이었다. 당시 선혜청 책임자였던 병조판서 민겸호(민영환의 생부)는 이때 피살됐다. 황현의 평가는 냉정했다.
“민겸호는 욕심이 많고 무식했으며…날마다 청탁뇌물을 도모했다…매관매직과 부정부패를 모두 그가 주도했다.”(<매천야록>)
그러한 가문의 부침 속에서도 민영환은 승승장구했다. 공조참판-홍문관 제학-이조참판-개성유수-공조참판-한성우윤-예조판서-형조판서-병조판서 등 그가 거친 관직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최초의 세계일주자
그렇게 꽃길만 걸었던 민영환의 삶을 바꿔놓은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을까. 이 대목에서 ‘민씨 척족의 탐학’을 매섭게 꼬집은 황현의 ‘민영환 한 줄 평’이 눈길을 끈다.(<매천야록>)
“…고종의 외척으로 반평생 좋은 벼슬만 했지만…과거의 민영환이 아니었다. 이때 큰 절개를 세워 늠름한 열사의 기풍이 생겼다.”황현이 언급한 ‘이때’가 언제였을까.
1896년(고종33) 러시아 니콜라이 2세(1894~1917)의 대관식(5월26일)에 특사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명성황후 시해(1895년 10월8일)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1896년 2월11일)한 절체절명의 시국이었다.
민영환은 상해-요코하마-밴쿠버-뉴욕-런던-플러싱-베를린-바르샤바를 거쳐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귀국은 이르쿠츠크-바이칼호-치타-하바로프스크-아무르강을 거치는 시베리아 횡단노선을 택했다.(10월21일 귀국) 6개월21일간의 긴 여정이었다.
민영환은 이듬해(1897년 3월)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상해-나가사키-마카오-홍콩-싱가포르-수에즈 운하-흑해-지중해-우데사(우크라이나)-상트 페테르부르크 노선을 택했다. 민영환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식(1897년 6월)에 참석한 뒤 미국 본토와 하와이 등을 거쳐 돌아왔다.(1898년 1월)
지구를 동으로(1차), 서(2차)로 한바퀴씩 돌았으니 민영환은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인물이었다. 그것도 지구를 두바퀴나 돈…. 하지만 민영환의 외교성과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한숨만 쉬었던 민영환
특히 1차 러시아 방문(1896년 5~8월) 때 민영환 사절단의 가장 큰 현안은 러시아의 군사·재정지원이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이 기댈 곳은 바로 러시아였다.
무엇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500여 명의 일본군이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있었다. “빨리 환궁해서 자주권을 확립하라”는게 시중 여론이었다. 그러나 대책없는 환궁은 곧 군주를 사지로 모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종의 안전을 보장할 궁궐 경비병이라도 확보해야 했으므로 러시아의 지원이 절실했다.
재정문제도 절박했다. 영국인 재정고문 존 맥리비 브라운(1835~1926)은 “조선 재정은 파산 일보 직전”이라고 진단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외교가 호락호락한가. 맹방으로 여긴 러시아는 자국의 이익을 좇아 제 살 길을 찾느라 동분서주했다. 일본과의 외교전에서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조선 국왕’을 협상카드로 삼았을 뿐이었다.
민영환은 미온적인 러시아의 태도에 절망했다. 민영환을 수행한 윤치호(1865~1945)는 “크게 낙담한 민영환은 ‘내 무능력 때문에 일이 성사되지 못했다’고 자책했다”면서 “사절단 숙소엔 민영환의 한숨소리민 들렸다”(<윤치호 일기>)고 전했다.
그러나 민영환은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공식 일정이 끝났음에도 러시아측과 처절한 외교전을 이어갔다. 그 결과 민영환 사절단은 13명의 러시아 군사교관과 함께 귀국한다.
이들 러시아 군사교관은 약 800명의 조선군을 양성했다. 고종은 이듬해(1897년) 2월 러시아 교관이 길러낸 조선군의 호위를 받으며 환궁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돌아온 고종은 그해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민영환의 외교가 빈손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우리 민대감이 달라졌어요!”
이때부터 민영환은 ‘탐관오리’라는 다소 ‘억울한’ 이미지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환골탈태한다.
<매천야록>은 “구라파와 미국을 둘러보고 천하대세를 연구하고 국사를 걱정한…민영환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독립신문 역시 “민찬정(민영환)이 새사람이 되었다”(1896년 11월10일)고 평가했다. 민영환은 독립신문과의 귀국 인터뷰에서 “러시아 방문에서 천 가지 만 가지 꿈도 꾸지 못할 일을 많이 보았다”면서 느낀 바를 전했다.
“외국에서는 놀고 먹거나 남에게 의지하여 사는 사람들이 없다. 그래서 자주 독립할 마음이 다 있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임금과 동포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천한 일을 하는 이들도 거짓말하는 법이 없고 다 읽고 쓰고 셈을 할 줄 안다…”
민영환은 “조선도 차차 개혁을 하지 않고는 나라가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민영환은 세계일주 경험 등을 통해 국가의 방책 또는 외교책과 내정개혁 방안을 ‘시세 4조’와 ‘비어 10책’으로 정리했다. 그중 관리의 봉급을 후하게 주어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자는 견해가 눈길을 끈다. 일부일처제와 의료기관 확충, 학교설립, 문호개방을 주장한 대목도 있다.
■속출하는 미담기사
1898년 10월 독립협회는 궁내부대신 이재순(1851~1904)을 통해 “정부 요인 중 인민들이 가장 믿는 이는 한규설(1848~1930)과 민영환 뿐”이라고 역설했다. 이 즈음 독립신문 등에는 민영환 관련 미담기사가 봇물을 이룬다.
“가난했던 민영환씨가 부인을 시켜 집안 물건을 전당 잡히려 했다…이를 딱하게 여긴 어떤 이가 돈 3000냥을 빌려주었다. 그러나 민씨는 ‘공연히 돈을 주고받는 행위는 부끄러운 풍습’이라며 돌려보냈다.”
이때 민영환은 “돈은 받지 않지만 나라 운용에 유익한 말이나 나의 잘못을 꼬집는 충고라면 기꺼이 받겠다”고 덧붙였다.(1897년 2월4일) 호감도를 쑥쑥 올리는 일화가 이어진다. 예컨대 민영환이 유럽 방문을 위해 군부대신 직에서 물러나자(1897년 1월) 독립신문은 ‘유감의 뜻’을 표했다.
“군부대신 민영환은 휘하 부대원들을…공평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므로 군대가 잘 운영되고 있는데…만일 민씨가 외국에 가면 정부에 좋은 사람 하나가 없어지는 격….”(1897년 1월23일)
이밖에 “군부대신 민영환이 총에 맞은 병사의 집에서 손을 잡아주었다”(1896년 12월5일) “부대를 찾은 민영환이 사비 1만냥을 상급으로 쾌척했다”(12월10일) “용달 회사가 민영환에게 교자(만두) 한 판을 바치자 ‘병졸과 함께 먹여야 한다’고 거절했다”(12월19일)는 등의 기사가 줄을 잇는다.
■응석부린 40대 아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된다.
민영환은 조병세(1827~1905) 등과 함께 을사오적(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의 처단과 조약 파기 등을 요구하는 연명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상소도 쓸모 없었다.
민영환은 자결순국의 길을 택한다.
“민영환이 어머니(서씨)의 볼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어린애처럼 응석을 부렸다, 어머니는 ‘우리 아이가 마음이 약해졌느냐’고 했다. 민영환은 아내(박수영 여사)를 찾아갔다. 세 아이는 이불 속에서 자고 있었다. 아내는 임신중이었다. 민영환은 웃으면서 ‘관상가가 나보고 아들이 5명이라 했는데, 부인이 지금 쌍둥이를 임신했구려!’라 했다.”(<민충정공진충록> <매천야록> 등)
부인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빙긋 웃었다. 그렇게 작별인사를 마친 민영환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대성통곡했다.
옛 하인(이완식)의 집을 찾은 민영환은 칼을 꺼내 두번이나 목을 찔렀다. 칼이 짧아 첫번째 찌를 때 절명하지 않은 것이다. 칼자루에 묻은 피가 미끄럽자 벽에 피묻은 손을 닦은 뒤 다시 정신을 차려 찔렀다.
■‘이것은 충신의 피’
이때가 1905년 11월30일 오전 6시였다. 민영환의 죽음이 알려지자 서울 시내에 곡소리가 퍼졌다.
“각 공관은 물론 일본인들도 크게 놀라 한 곳에 모여 슬피 울었다…조문객들은 벽에 묻은 피를 비단으로 닦아 옷속에 감추면서 말했다. ‘이것이 충신의 피다’라고….” 어머니 서씨는 고종의 명을 받고 조문 온 비서승 조남승(1882~1933)에게 “폐하께서 중흥을 꾀하시어 민영환의 한을 풀어달라”고 전했다.
“민영환의 주머니 속에 두 종류의 유서가 있었다. 하나는 국민에게, 다른 하나는 각국(5개국) 공사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유서 중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은 앞서 소개한 바 있다. ‘각 국(미·영·독·프·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는 다음과 같다.
“…귀 공사들이 일제의 행위를 귀 정부와 인민들에게 보고하여 우리 백성의 자유와 독립을 도와주시면…죽는 사람도 지하에서 웃음을 지으며 축하할 겁니다.”
민영환은 “대한을 경시하거나 우리 인민의 혈심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란다”고 신신당부했다.
<대한매일신보>(1905년 12월3일)는 “모든 인민은 민영환의 유서 137자를 마음과 뼈에 새겨서 분격한 마음을 떨쳐 일으켜 다 함께 죽을 혈심으로 자유독립을 회복하자”고 촉구했다.
민영환의 죽음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1827~1905), 주사 이상철(1876~1905), 병정 김봉학(1871~1905) 등 전·현직 관리와 군인들이 민영환의 뒤를 따라 순국했다.
민영환의 장례식에서 상여꾼이 발인가(‘해로가’)를 부르자 모든 사람들이 통곡했다.(대한매일신보 1905년 12월21일)
“…이 충성, 이 절개, 만고에도 짝이 없네, 빛이 나네, 빛이 나네, 대한 산천 빛이 나네…독립일세, 대한제국 독립일세, 자유로세, 이천만민 자유로세. 이 독립 이 자유는 우리 민공(영환) 공이로다…피 흘리신 공이로다.”(해로가)
■피묻은 방에서 피어난 대나무
이후에도 꺼지지않고 이어지던 민영환의 ‘자결순국’ 추모 열기는 1906년 7월 다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다. 선생이 자결 순국한 뒤 그가 사용했던 칼과 피묻은 옷은 집안의 방 마루에 그대로 간직해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옷을 볕에 말리기 위해 방으로 갔던 부인(박수영 여사)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피묻은 옷을 둔 방에서 대나무가 자라는 걸 본 것이다.
대한매일신보(1906년 7월5일)는 “충정공 생전에 옷과 의자를 두던 방 바닥 아래에 대나무가 문득 자라나 곧장 올라온 것”이라 전했다. 그러면서 이 대나무를 고려말 충신 정몽주(1338~1392)의 ‘선죽(善竹)’에 비유했다.
“예전에 정몽주가 죽은 자리에서 대나무(선죽)이 절로 자랐는데, 지금 민충정공의 집 안에서 대나무가 또 피어나니 이는 두 공(정몽주와 민영환)의 충절이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민영환의 대나무를 ‘혈죽’이라 했다. 박은식(1859~1922)은 ‘혈죽기’에서 ‘이 대나무는 민충정공의 피’라 규정했다.”(대한매일신보 1906년10월17일)
■봇물터진 혈죽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던 기쿠다(菊田) 사진관은 1906년 7월15일 대한구락부의 의뢰를 받아 민영환의 ‘혈죽’을 찍었다. 그 사진이 지금 남아있다. 사진을 보면 바닥에서 솟아오른 대나무가 생생하게 보인다.
그중 5줄기는 부인(박수영 여사)이 광목천에 싸서 다락 속에 몰래 보관했다가 해방 후 공개했다. 대한매일신문 1906년 7월17일자는 화가 양기훈(1843~?)이 그린 ‘혈죽도’를 게재하면서 “충절을 애모하는 독자들은 감상하라”고 했다. 정몽주의 ‘선죽’에 비견되는 ‘혈죽’이 자랐다는 이른바 ‘혈죽 자생’ 소식은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매천야록>은 “수많은 사람들이 혈죽을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전한 뒤 “심지어 서양 상인들도 와서 술을 따라놓고 곡했고, 청나라 사람들도 그 광경을 시로 읊어 시권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국내외 신문에도 ‘혈죽’ 기사가 봇물을 이룬다. 1906년 7월10~1907년 2월10일 사이 7개월간 각 신문과 잡지 등에 ‘혈죽’을 소재로 실린 한시만 해도 47제에 달한다. ‘혈죽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14세 아이 임병은’이 지은 ‘혈죽시’를 보라.
“아름다워라. 고택 마루에 자라난 네 그루 대나무…대의 밝고 밝아 해처럼 걸렸으니 공은 포은(정몽주)과 한짝이구나.”(8월15일)
여성, 즉 ‘영남 여사 규원’이 지은 ‘혈죽시’는 “민공의 굳센 충정 세상에 있기 어려우니, 한번 죽음으로 분명코 국은에 보답했다”(8월16일)고 읊었다.
‘80세 노인 윤영구’는 “…여든이 되도록 구차하게 삶이 도리어 부끄러워 석양에 통곡하며 충신의 문을 지난다”(8월17일)고 자책했다.
중국인도 추모시의 대열에 합류했다. ‘호북성 출신인 중국인 범염자’는 “선생의 대나무…한 점 한 점 핏자국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대한학회월보> 1908년 2월호)
인천 영화학교 생도 8명이 지은 ‘민충정 혈죽가’는 훗날 만주의 독립운동가 사이에도 널리 애창되었다.
“어화 우리 학도들아. 이내 말씀 들어보소, 대한동포 합심기초 민충정의 공로로다…보답하세. 보답하세. 민충정공 보답하세. 잊지마세, 충의 두 자, 잊지마세.”(대한매일신보 1906년 8월3일 등)
민영환은 국정에 몸담았던 관리로서 망국의 책임을 짊어졌다. 눈 딱 감고 호의호식 할 수도 있었던 민영환 대감이었지만 그는 자결순국을 택했다. 아니 죽음이 아니라 사이불사(死而不死), 즉 ‘죽어도 죽지않는’ 길을 걸었다. (이 기사를 위해 배성환 고려대박물관 학예부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고려대박물관, <사이불사 민영환> (고려대박물관 45회 특별전 도록), 2005
국가유산청, <근대문화유산위원회 회의록>, 2024.3
우미옥, ‘민영환의 러시아 사행과 현실인식의 변화’, 중앙대 석사논문, 2016
이민원, ‘민영환의 유럽방문과 모스크바 외교’, <고려대박묽관 45회 특별전 도록>, 2005
이성현, ‘민영환의 순국 담론에 대한 고찰’, <강원사학> 26권, 강원사학회, 2014
이희목, ‘민충정공 혈죽시 연구’, <한문학보> 7권, 우리한문학회, 2002
조세현, ‘민영환 사절단의 세계일주와 대양 항해-해천추범과 윤치호일기를 중심으로’, <도서문화> 62권,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2023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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